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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창숙 Sep 18. 2021

대일밴드야! 밥 먹자!

살아온 날의 단상


  엄지손가락 위를 종이로 베었다. 살짝 스쳤는데 베인 것이다. 피는 나지 않았으나 살짝 벌어졌고 조금 빨갛게 되었고 물이 닿으면 쓰라렸다. '다른 사람 배 가르고 수술한 자리보다 내 손끝에 가시 박힌 게 더 아프다.'라는 말이 생각나서 피식 웃었다. 그땐 밴드 그러면 모두  대일밴드였기에 밴드 찾아 손가락에 감으면서 또 한 번  웃음이 터져 나왔다. 대일밴드라.



  올해가 2021년이니 지금부터 28년 전의 일이다. 아들 녀석이 초등학교 1학년 때였으니까. 난데없이 학교에서 돌아온 녀석이 영어학원에 보내달란다. 영어공부가 하고 싶어서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세상에! 우리말부터 배워야 하는데 넘의 나라 말부터 배우겠다니. 어쨌든 학구열에 불타는 아들을 영어학원에 등록시켰다.


  아들은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첫날부터 '하우 두 두, 나이스 미튜, 화인 땡큐 앤드 유'를 연발했다. 이렇게 열심히 외우고 공부를 좋아하긴 처음이었다. 아들이 좋아하니 나도 덩달아 좋아했다. 아들의 행복함이 내게 온전히 전해져 나도 하루 종일 '하우 두  , 나이스 미튜, 화인 땡큐, 앤드 유'를 노래처럼 불러댔다. 처음 영어라는 것을 배우는 사람처럼.


  아들 녀석은 나의 긴 머리카락을 유난히 좋아했다. 한 번은 내가 허리까지 내려온 긴 머리를 간수하기 힘들어 어깨까지 자른 날,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아들은 나를 보자마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내 옆을 못 본 척 스쳐 지나갔다. 왜, 무슨 일이 있었냐고 손을 잡으며 물으니, "엄마가 머리를 자르니까 기분이 나쁘지." 라며 내 손에서 손을 빼는 것이었다. 나는 웃지도 못하고 "그랬구나, 엄마가 머리를 잘라서 아들이 기분이 나쁘구나." 하면서 빌 일도 아닌데 큰 잘못을 저질은 죄인처럼 싹싹 빌었다. 오호! 통재라!


  그런 일이 있고부터는 내 머리카락의 주인은 아들이었다. "아들, 엄마 파마할까?" "머리가 자꾸 빠지네. 자를까?" 하고 물으면, 말없이 고개를 좌우로 한 번 저으면 그건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다섯 살 아들은 내 자유와  주권을 빼앗아 갔다.

                        외도에서 찍은 사진


  영어학원에 다닌 지 한 2주일쯤 되었을 때, 학원에서 돌아온 아들은 "엄마, 나 대일 밴 드야." 하는 것이었다. "대일밴드?" "응, 영어 이름을 선생님이 지어주셨어. 대일 밴 드라고" 그러며 "대일밴" 까지는 힘을 주고 "드"소리는 작게 소리 내는 것이었다. "그래?"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선생님이 영어 이름을 대일밴드라고 지어주셨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선생님의 깊은 뜻이 있었을 거라 생각해서 나는 그날 저녁 내내 이 이름을 불러주었다. "대일!  밥 먹자. 대일! 씻을까?" 아들은 다른 날들과 다르게 순한 양처럼 시키지도 않은 숙제도 혼자 척척 다하고, 가방 정리며 옷 정리도 잘하였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영어학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들이 친구들하고 잘 어울리고 집중력이 아주 좋다는 것이었고,  수업 시간엔 장난도 치지 않는 모범생이라는 것이었다.  난 깜짝 놀랐다. 집중력이 좋다고? 모범생이라고? 집에서 는 바가지가 나가서는 안 샛나? 그래서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선생님! 지금 누구 말씀하시는 거예요? 제 아들 ㅇㅇㅇ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어머니. ㅇㅇㅇ요. 아이가 예의도 바르고 인사성도 좋고 수업시간에 떠들지도 않고 최곱니다."

"아! 그래요. 고맙습니다. "

이렇게 폭풍우 같은 칭찬을 들으니 할 말이 없어 연신 고맙다는 말만 해댔다.


그리고는

"혹시 학원에서 수업 중에 병원 놀이나, 약국 놀이 같은 거 하나요?"

"아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요?"

"아들이 며칠 전에 선생님께서 영어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하시며, 자기 이름이 대일드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혹시 병원 놀이나 약국 놀이를 하해서요, "


"네? 아니요? 대일밴드라니요? ㅇㅇ 영어 이름은 데이비드인데요?"

"네? 데이비드라고요? 아,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전화를 서둘러 끊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집중력도 좋고, 장난도 안치는 모범생인 아들의 영어 이름이 대일  드가 아니라 데이비드였던 것이다.


 아들의 영어 이름은 온 집안 식구를  배꼽 빠지게 하고 나서 '데이비드'로 바뀌었다. 또한 일곱 살 내 아들은 학구열에 불탄 게 아니라 같은 반 짝꿍인 긴 머리의 주인공에게 불타 있었고, 집중하고 있었고, 그 아이에게 잘 보이려 모범생이 되었던 것이다.  


아들에게 물어보지 않으려다 물어보았다.

"짝꿍이 어디가 좋아? 어디가 예뻐?"

"머리가 길잖아!"

"머리가 길어서 예쁘구나?"

"응!"

대답은 간결했다.

TV에서 '미스코리아  대회' 나   '미스유니버스 대회' 때도 머리가 길어야 예쁘다고 했는데..


아들은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긴 머리의 짝꿍 따라 영어학원에 것이었고,


 1살 많은 연상의 8살 긴 머리 아이가 내 아들 입에서  "하우 두 유 두, 나이스 미 튜, 화인 땡큐, 앤드 유"를  술술 나오게 했다.


연상의 8살 긴 머리의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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