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하는 인간

한강 작가의 글을 읽고

by 나비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그대로 내뿜어버리고 싶다가도 머릿속에서 계획을 짜다가 다시 풀어버리곤 하는 출근길이었다.

나의 무능력인가 아니면 성격상의 소심함과 부끄러움인가.

착하게 베풀고 살았건만 돌아오는 것은 그에 반해 형편없다는 소리다.

실리를 추구해야 하는 것인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데 다정해지려고 노력해야 다정함이 나온다.

생각하고 있어야 억지로라도 나온다.

답이 없다.

잘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못 한 것이 되는 것이 나의 의지가 아니고 타인의 입방아에서 시작이 된다면 골치 아프다.

잊어버리려고 해도 싫은 건 싫은 것이다.

고통이 없는 관계는 나밖에 없다.




‘회복하는 인간’을 읽고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라는 것을 모른다. “라는 문장이 반복되어서 나온다.

가장 와닿은 구절은

”그 어떤 것도 모르는 채 당신은 계속 페달을 밟고 있다. “이다.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알지 못하는 것 투성이로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좋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미리 준비한 것보다 더 좋다.

일부러 꾸미지 않아서 좋다.

멋있어지려고 하지 않아야 멋있다.

소설 속의 자매는 그다지 좋은 사이는 아니다.

키가 큰 언니와 작은 동생과의 대립, 언니의 죽음, 어린 시절의 추억이 그려져 있다.

시작은 병원에서 화상을 치료하는 것부터 아물기 직전 까지라는 것을 모른다.

곰곰이 생각해 보지만 미래를 모르지만 뭐 하리라는 것을 모른다로 표현하면 앞서서 아는 것이다.

독자에게 미리 알려주는 결과를 초래한다.

의도가 무엇일까, 잘 알지 못한다.

책의 마지막에 비평이 나오리라는 것을 모른다.

가장 좋았던 비평은

”회복하는 인간은 무엇으로도 잊힐 수 없고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인간 삶의 근원적 아픔을 그린다. 그 아픔을 껴안고 가는 것만이 우리 삶을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도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이었다.

누구의 비평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늘 아프다.

아프고 또 아프고 아문다.

아문 자리가 흉터로 남는다.

삔 발목을 치료하는데 뜸을 뜬다.

얼마나 뜨거웠을까.

침도 아픈데 뜸은 떠보지 않았다.

타들어 가는 고통이 점점 살갗으로 다가올수록 극대화될 것이다.

처음에는 모를 정도의 아픔이었다가 서서히 고통은 가중된다.

살기 위해서는 치료해야 한다.

먹고사는 것이 바빠서 상처를 돌볼 겨를이 없다.

곪아 터져 구멍이 날 정도의 상처를 참고 견딘다.

견디지 못하는 상처는 없는 것일까.

물리적인 상처와 정신적인 상처를 비교하라고 썼을까.

당연히 시간이 지나면 아무는 발목의 상처는 회복하는 인간이고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꾸역꾸역 나오는 회복하지 못하는 인간이다.




자전거를 세차게 밟아보고 물가의 새들을 관찰한다.

변한 것은 없다.

나만 아프고 그렇다.

아프다고 말하면 들어줄 사람이 있는가.

홀로 싸워야 하는 고통의 연속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일까.

무슨 고민과 고통으로 사는지 알 수 없다.

다 아프고 힘들다고 말하는데 무슨 고통인지 모른다.

꺼내보고 관찰해야 하는데 알 길이 없다.

어디를 건드려야 툭 튀어나올지 모른다.

회복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또 일어나는 것이다.

아프다, 소리 질러본들 결국은 내가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인정해 주는 사람은 감사한 것이다.

알 수 없다.

아무도 나의 고통을 알 수 없다.

골치 아픈 것은 아침이다.

저녁에 사라진다.

또다시 잠이 오지 않는다.

또다시 아침이면 불쑥 화가 태양처럼 치밀어 오른다.

이렇게 감성적인 사람이었나.

사리 분별하는 줄 알았는데 나약한 존재였다.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는가.



자매 간의 다툼이 없어 보이는데 키가 큰 그녀는 당신을 미워한다.

잘못은 동생 탓이고 언니는 장난치다가 다치고 만다.

같이 놀다가 책상 모서리에 다친 언니와 안 다친 동생이 있다.

당신은 동생이고 그녀는 언니이다.

언니는 먼저 저세상을 뜨지만, 동생은 언니를 먼저 보냈다.

물론 부모도 자식을 먼저 보냈다.

누구의 아픔이 가장 큰 지도 알 수가 없다.

회복하는 시점의 차이가 분명히 사람마다 다르다.

빨리 잊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이 많다.

아킬레스건 파열로 한동안 고생을 한 적이 있다.

시간이 의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술 후에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좋아진다.

언니를 잃은 아픔이 크다.

아픔이 크기 때문에 발목이 썩어 들어가는 것도 몰랐다.

바쁘게 일하면서 잊으려고 애쓴 것은 아닐까.

타들어 가는 고통을 감내했고, 구멍이 나도록 고름이 나는 복숭아뼈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육체적인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서서히 아물어 가는 것을 목격한다.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아문다.

가슴에 새겨진 정신적인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지만, 응어리진 흔적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본문 중에

”당신은 자꾸 잊어버린다. 조금 전까지 당신이 어디 있었는지, 무슨 치료를 받았는지, 지금은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 건지 잊는다.

“중략”

당신은 이미 잊었다. 자신이 얼마나 재치 있는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지, 나름으로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는지 잊었다. “

당신은 잊으려고 애를 쓰지만 잊었다고 표현했지만 잊지 못한다는 것을 오히려 강조하기 위해서 반대로 말한 것이 아닐까.

온통 검은색 차림의 당신이다.

검은색은 죽음을 의미한다.

왼쪽 발목이 접질린 이유는 언니의 장례를 치르고 산에서 내려오다가 접질렸다.

한의원에서 발목에 당신은 뜸을 뜬다.

여기에서 당신은 주인인 동생이고 그녀는 언니를 말한다.

뜸을 뜨는 동안 눈물을 흘리는 당신을 보고 간호사는 당황한다.

뜸은 불로 태우는 시술이다.

이미 그녀는 이 세상에 없다.

그녀는 화장하지 않았다.

불태워 없어지면 안 된다고 땅에 묻히기를 원했다.

당신은 일에 몰두한다.

일로써 아픔을 잊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픔은 잊히지 않는다.

발목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지고 고름이 나고 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할 만큼 일에 몰두한다.




본문 중에

”당신의 언니가 투병하던 마지막 삼 개월 동안 당신은 그녀를 거의 만나지 못했다.

그녀가 당신을 만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당신과 그녀가 이미 오래전부터 소원한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하나뿐인 친자매였음에도, 당신은 그녀의 병세에 대한 모든 소식을 어머니로부터만 전해 들었다. “

관계가 틀어지면 직접 해야 할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언니가 아파도 동생인 당신은 소식을 전해 들어야만 했다.

희한하지만 언니의 질투는 동생의 결점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누군가의 결점이 어떤 사람에게는 장점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보지 못하지만, 나를 제외한 사람은 볼 수 있다.

눈이 앞으로 뚫려있기 때문이다.

안에도 눈동자가 있다면 나를 볼 수 있을까.

아니면 타인의 보는 것과 같은 시선이 하나쯤 있다면 좋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본모습은 이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당신은 자전거를 타다가 기쁨을 느낀다.

자전거를 타면서 맞는 바람은 당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자전거를 타는 것도 죄이겠느냐고 당신은 당신에게 물어본다.




본문 중에

”미친 듯이, 아무 까닭도 없이 소리를 지르고 싶은 기쁨을 느꼈다.

그러니까 지난 팔월, 당신의 언니가 친정의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형부의 차에 실려 병원을 오가고 있었을 때 당신은 그렇게 미칠 듯한 기쁨을 느꼈다,“

자전거를 타면 서의 기쁨이 반전이다.

가족을 보내는 아픔을 겪어보지 못했다.

먹는 것조차 막아선 안 되지만 살아있는 인간은 먹어야 한다.

잠도 자야 한다.

남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살아가는 일이다.

싫어했던 사람이 가든 좋아했던 사람이 가든 남은 사람은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희망적인 사실이 조금씩 꿈틀거릴 거라는 사실을 당신은 모른다.

인간의 삶은 고통이다.

그 속에 희망이 있다.

자매 관계는 미움과 좋아함이 공존한다.

모든 관계가 그렇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진다.

그렇게 기쁨은 잠시 왔다가 사라진다.

슬픈 이야기다.




자매의 이야기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시기와 질투를 말하고 싶었을까.

죽은 자를 생각하는 산자의 고통을 말하고 싶었을까.

정신적인 고통이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심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까.

회복하는 인간과 회복하지 못하는 인간의 차이점을 말하고 싶었을까.

대립과 반대되는 일치를 말하는 것일까.

삶과 죽음을 말하고 싶었을까.

상처와 회복을 말하고 싶었을까.

과거와 미래를 말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를 만났다.

한강 작가는 진실을 이미 제목에 말하고 있다.

인간은 회복한다는 것이다.

회복하지 않는 것은 우주에는 없다.

소멸과 탄생으로 반복한다.

관성의 법칙이고 거역할 수 없는 인간의 업이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희망을 품는다.

지금 겪고 있는 아픔은 치유로 가는 여정이다.

여정은 힘들고 괴롭다.

아직은 치고받고 싸울 수밖에 없다.

이 몸이 땅으로 가기 전까지는 내려놓을 수 없는 것들이 많다.

다 똑같다.

이미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은 쉽게 하고 나와 상관없으면 그만이다.

어차피 홀로 와서 홀로 가는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보아도 인간은 신이 아니다.




아침이면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지 않으면 끝이다.

감정은 하루에도 수만 가지라 머리가 아플 정도이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끝이다.

뭐라도 욱여넣어야 살 수 있다.

계절은 변함없이 반복한다.

아무리 거부해도 겨울은 온다.

함박눈이 곧 내릴 것이다.

눈이 만져지면 손이 시려진다.

시린 손은 서서히 체온으로 회복된다.

온기가 없으면 끝이다.

태양이 뜨지 않으면 끝이다.

물을 주지 않으면 끝이다.

우리는 끝으로 향한다.

너나 할 것 없이 끝으로 간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낭떠러지로 걸어간다.

예외는 없다.

매달리다가 기어코 떨어진다.

간혹 반대로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다가 다시 떨어진다.

떨어진 공간에는 무엇이 있을까.

펄펄 끓는 물이 있을까 아니면 푹신한 꽃밭이 있을까.

이왕이면 꽃밭이면 좋겠다.

가보지 못한 곳을 우리는 가고 있다.

평생을 살면서 다치고 회복하기를 반복한다.

회복하기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살아가는 동안에 많은 사람과 부딪치고 관계를 형성한다.

피를 나눈 가족도 나이가 들어서는 관계가 틀어지기도 한다.

아주 친했던 관계가 틀어지면 회복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지금도 회복 불능의 관계로 살아가는 관계도 분명히 존재한다.

내 마음처럼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는 착각하고 살아왔다.

착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보지 않고 살아왔다.

그렇게 다른 이의 마음이나 상처를 고려하고 생각했다면 잘 살지 못했을 것이다.

더불어 산다고 말하지만 내가 우선이 되지 않고 서는 버티기가 힘들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면 나는 너덜너덜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의 우선순위는 내가 되어야 한다.

좋은 관계는 누군가가 노력하는 산물이었다.

함께 노력하면 좋겠지만 한쪽이 더 하거나 부족하기 마련이다.

수많은 관계로 얽혀있다.

갈등은 무조건 존재한다.

갈등을 풀어보려 하지만 풀리지 않는다.




소설을 통해서 만나는 등장인물들은 우리의 현실에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속도가 빨라서 좋다.

요즘은 소설이 재밌다.

한동안은 자기 계발서를 읽었다.

읽는다고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날씨다.

날씨가 변하면 옷이 변한다.

날씨에 맞춰야 사람이 살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날씨가 우리의 옷차림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적응하기 위해서 몇 번이고 날씨에 맞춰서 갈아입어야 한다.

고집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회복하기 위한 몸부림이 바로 우리의 삶일 것이다.

거역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이 맞춰야 한다.

자연 앞에 인간은 아무 힘도 쓸 수가 없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연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그리고 탄생한다.

탄생한 인간은 죽으리라는 것을 모르고 산다.

노력과 치유의 시간이 필요하다.

놔두면 제자리를 찾는다.

회복하는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