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한낮의 연애

김금희 작가의 글을 읽고

by 나비고

커서가 깜박이는 것만큼이나 심장이 뛰는 책이다. 불안하고 뭔가 일어날 것 같은 아슬아슬하기도 하고 지나온 날들의 회상 같은 소설집이다. 이 책에는 김금희 작가의 9개의 소설이 실려있다. 가장 최고의 작품을 꼽으라 하면 당연히 타이틀인 “너무 한낮의 연애”이다. 집중도가 아무래도 타일틀인 이유도 있지만 가장 재미있었다. 학창 시절의 순수했던 연애스토리가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 책의 말미에는 해설이 실려있다. 이 정도의 평론을 쓰려면 얼마의 지식과 필력이 있어야 되는지 부러울 따름이다. 강지희 문학평론가의 글도 만족한다. 국문학과를 전공하고 싶은 충동이 목까지 차오른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여건과 된다 해도 안 할게 뻔한 나의 성정을 나는 잘 안다. 책 표지가 하늘색이어서 제목이 좋아서 마음에 든다. 기대하고 읽었다. 기대 이상이다. 내가 이 소설을 기대 이상이라고 말할 자격은 없지만 독자로서의 권리가 있으니 기대하고 평가한다. 저자의 정보를 보는 순간 동질감을 느꼈다. 인천의 인하대학교 출신이었다. 나는 이 학교 출신은 아니지만 인하대를 무척이나 드나들었다. 그 동네는 추억이 많은 곳이다. 소설 속 종로 맥도널드에서의 사랑고백은 내가 받은 것 마냥 기분이 야릇했다. 무심하게 툭 던진 고백이 나는 너무 좋았다. 주인공은 자꾸 물어본다. 계속 사랑하는지 확인한다. 여자 친구는 그렇다고 한다. 여자는 둘로 나뉜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여자와 말하지 않는 여자로 나뉜다. 그것은 남자도 마찬가지다. 나는 후자와 같이 산다. 너무 한낮의 연애는 너무 밤이 없다. 밤과 비슷한 것은 연극무대의 어두움과 그녀의 복장이다. 퀸 노래를 무척이나 좋아했나 보다. 나도 그랬다. 그녀의 집은 문산이다. 자동차가 나오는데 르망이다. 작가의 개인적인 연애사는 추측컨대 인천과 서울을 포함한 경기도 안에서 이루어져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랑했던 사람을 다시 보는 것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르겠다. 주인공은 한직으로 물러나서 점심을 혼자 먹게 되는데 그녀가 공연하는 연극무대를 보러 간다. 연극을 보러 가는 목적은 그녀를 보기 위해서다. 차를 빌려 문산에 있는 그녀의 집을 가는 것도 그녀를 보기 위해서다. 남자가 인사발령이 나지 않았다면 그녀를 다시 만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소설은 각자의 연애를 생각하게 한다. 학창 시절 선생님의 연애담을 들어도 재미있었고 주변의 연애담은 언제 들어도 재미가 있다. 나의 그녀는 청원경찰이었다. 봉천동이 집이었고 언덕이었다. 겨울은 추웠고 그녀는 예뻤다. 그녀가 보고 싶다. 이니셜은 NKY이다. 지나가다 보면 그녀가 나를 알아볼지는 미지수다. 순대타운에서 순대도 많이 먹었다. 그녀와 잠을 잤었는지도 희미하다. 그녀의 부모님을 뵈었던 것 같고 헤어졌다가 그녀가 울었던 기억도 난다. 그때가 가장 섹시했다. 너무 예뻤다. 그런 일은 두 번이나 있었다. 사람은 틀리다. 다시 만나서 혜화동 한복판에서 껴안고 눈물을 흘리던 또 다른 그녀의 얼굴도 너무나 예뻤다. 둘 다 예뻤다. 아마 소설 속의 연극배우를 하는 그녀는 주인공말고 다른 남자와 사귀었을 것이다. 여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했는데 정말로 사랑해서 고백했는지 아니면 잠깐 좋아서 말했는지 의문이다. 남자가 적극적으로 그녀를 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도 궁금하고 그녀가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양희가 필용에게 어제까지만 해도 사랑한다고 했던 양희가 하루아침에 이제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필용에게 할 때도 사랑한다고 처음 얘기할 때처럼 무심하게 말한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왜 여자들은 자기 멋대로 남자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지 모르겠다. 차임을 당하는 사람과 차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마음이 아플까? 둘 다 아프다. 분명히 양희도 마음이 아프고 필용도 아팠을 것이다. 둘 다 아프지만 필용이 더 아픈 게 맞다. 필용은 자꾸 물어본다. 우리 사랑이 어떻게 될지...... 그런데 대화 속에서 양희는 이런 말은 한다. “지금 사랑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는데,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니까요.” 이 멘트는 굉장히 짜증 나는 말이다. 이런 여자들이 제일 싫다. 내일은 모른다. 한 발은 걸치고 있자는 심보다. 애간장을 끓이는 말과는 차이가 있다. 나는 이 말이 제일 싫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지만 사랑한다고 말해놓고 내일은 모른다. 그러면 반대로 필용이 먼저 고백을 하고 사랑하는데 내일은 모른다고 말하면 양희는 기분이 좋았을까? 분명히 양희도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굳이 물어볼 필요 없는 사랑의 초보자인 필용은 맨날 만나면 물어본다. 맨날 물어봐서 양희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을 수 있다. 순진한 필용은 오늘도 사랑한다고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양희는 분명히 양다리가 맞다. 이름에 ‘양’ 자가 들어간다. 양희는 도통 꾸미지를 않는다. 양희가 필용을 많이 사랑했다면 예쁘게 입고 다녔을 것이다. 사랑하게 되면 옷차림부터 변한다. 외모에 신경을 쓰게 되고 거울 한번 더 보는 것이 맞는데 양희가 수수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변화가 없다. 필용이 양희한테 찾아가서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껴안아야 했다. 그렇게 했으면 사랑이 다시 시작되는 건데 아쉽다. 나 같으면 자고 왔다. 필용은 울보다. 울면서 돌아왔고 연극이 끝나고도 울었다. 양희가 연극무대에서 팔을 벌려 흔들었을 때 끌어안았어야 했다. 필용은 안기부터 배워야 한다. 제발 여자를 끌어안아라!

“조중균의 세계”는 독특하다. 조중균은 점심을 먹지 않는다. 그래서 직장에서 안 먹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 서명을 받는다. 조중균은 자기 세계가 강하다. 말투도 그렇고 소리에도 민감하고 점심도 안 먹는다. 조중 균은 상한 떡도 준사람을 생각해서 잘도 먹는다. 시험지에 이름만 써도 점수를 주는데 조중균은 시를 썼다. 그 시는 자기가 썼지만 자기 시는 아니라고 한다.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자기 이름을 붙여 자기가 쓴 것처럼 연단에서, 광장에서, 거리에서 낭송하는 시가 되었다. 조중균은 타협은 안 하지만 배려가 있는 사람이다. 실력도 있는 사람이다. 그 세계를 이해한다면 푹 빠질만한 사람이다. 조중균은 출판사에서 교정일을 보는데 나중에 잘린다. 조중균 스타일은 어느 곳이나 있다. 나는 그런 조중균이 좋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지 못해서 그가 좋다. “세실리아” 도 재밌게 읽었다. 일단 배경이 인천이라 좋았다. 동창들의 모임에서 있을법한 내용들이다. 실제로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 허구지만 사실처럼 느껴진다. 같은 학교 같은 동아리 친구들이 모여서 회포를 푼다. 나 또한 사진동아리여서 1년에 한두 번 모임을 갖지만 유독 한 친구가 연락이 안 돼서 보지를 못한다. 그 친구는 선생님이 되었다는 소식만 들었다. 그렇다 송년회 겸 모이는 게 다다. 그 외는 연락두절로 살다가 누가 먼저 모이자 하면 모인다. 모이면 작년에 했던 이야기 올해도 하고 내년에 한다. 변함이 없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다. 그렇고 그런 이야기로 술잔을 기울인다. 소설 속에 세실리아의 별명은 ‘엉겅퀸’이다. 이유가 재밌다. 애정결핍에 시달리는 막냇동생처럼 엉기길 잘해서 별명이 엉겅퀸이었다. 사정없이 엉기는 스타일이 바로 세실리아다. 세실리아는 유명한 미술작가다. 폐기된 전자기기로 조형물을 만드는 설치미술을 한다. 모임에서 “세실리아가 과연 우리를 보고 싶어 할까?” 이 말을 한 우리는 세실리아의 안위가 궁금하고 보고 싶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한 친구가 찾아가서 세실리아를 만나 차이나타운에서 소주를 마시며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눈다. 친구들과의 모임은 그 밥에 그 나물이고 뭐 하나 특별할 것 없지만 만나는 것만으로 좋은 것이다. 사진부 친구들을 본 지가 1년이 넘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봐야 할 것 같다. “반월” 은 가족의 휴가 이야기이다. 이모가 사는 섬으로 휴가를 간다. 이모는 보건소에 일하는 간호사지만 의사나 마찬가지다. 그 섬에는 리조트도 있지만 분위기는 황량하다. 주민 할머니가 먹으라고 죽은 토끼를 가져다주지만 토끼를 땅에 묻어준다. 위협을 하는 주민을 피해 반월이 떠있는 바다로 들어가서 파도에 휩쓸렸지만 토끼의 보은인지는 모르지만 구조가 된다. 반달일 때는 조류가 약하고 초승달과 보름달일 때 조류가 강하다. 바다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섬은 휴양지인 동시에 그들의 삶의 터전이다. 그 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요즘의 섬들은 대부분 다리가 놓여서 왔다 갔다 왕래가 자유롭다. 그렇지 않은 섬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섬은 배를 타야 한다. 잘 복귀하기를 희망한다. “고기”는 웬만해선 냉동제품이라 크게 생각 못했는데 신경 써서 유통기한을 봐야겠다. 마트에서 산 고기가 라벨을 벗겨보니 오래된 고기였다. 유통기한을 속인 제품이라는 사실을 안다. 어떻게든 무마해 보려는 마트 직원은 돈봉투를 내민다. 그러나 받지 않는다. 나라면 이런 경우는 내가 산고기에 10배를 신선한 고기로 받고 각서를 받을 것 같다. 그러나 남편이 들고 온 고기의 정체가 궁금하다. 추측컨대 고라니나 멧돼지 아니면 또 토끼일 수도 있겠다. 다른 소설이지만 같이 있어도 될 만큼 한 소설 같다. “개를 기다리는 일” 은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남일 같지 않을 것이다. 반려동물은 가족이다. 두모녀는 개를 찾기 위해 차에서 하염없이 기다린다. 제보도 받고 사례금도 준비한다. 찾기만 한다면 다줄 태세다. 현재 내가 키우는 고양이가 그렇게 된다면 나도 그렇게 찾아 헤멜 것이다. 상상조차도 하기 싫다. 눈이 커다란 우리 집 고양이 ‘가을이’는 암컷이고 품종은 브리티쉬 숏헤어 골드이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는 고아원에서 자란 간호사의 이야기이다. 고아원에서는 도와달라는 편지가 해마다 온다. 고아원 수녀님의 얼굴과 닮은 암환자가 그녀에게 신발을 찾아달라고 한다. 그녀가 이사한 집 화장실에서는 별이 보인다. 고아원에 돈을 보내야 하는지 고민한다. 사람도 태어나서 죽고 별도 태어나고 죽는다. “보통의 시절”은 가족이 성탄절에 모여 자기 집안의 원수를 만나러 간다. 그 원수는 자기가 안 죽였다고 한다. 큰오빠는 위암에 걸렸다. 가족이 아닌 학생도 같이 따라간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사람은 살아야 된다. 가족들에게 큰오빠는 가장이었다. 아웅다웅해도 가족의 위대함이 느껴진다.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아마도 강아지보다 고양이 키우는 가정이 더 많아졌나 보다. 한바탕 벵갈고양이의 행방을 찾기 위한 고군분투가 이어진다. 반려동물을 사랑하고 애타는 마음이 느껴진다. 아파트 수위 아저씨들은 모든 일을 다한다. 평론의 제목은 “잔존의 파토스”이다. 파토스는 일시적인 격정이나 열정 또는 예술에 있어서의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요소이다. 일목요연하게 소설들을 정리하고 평했다. 처음 접하는 김금희의 소설은 독립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사람은 태어나서 사랑하고 일하며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한다. 인생사 다 똑같다. 다른 것 같지만 같은 인생을 산다. 작가 김금희가 살아온 삶도 소설과 같을 것이다. 나도 같다. 모두가 처한 현실에서 갈등이 생겼다 없어지기를 반복한다. 수없이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너무 많아서 별이 많은 것이다. 작가 또한 견디고 있다고 한다. 견디는 힘은 각자의 이유가 있겠다. 하루하루 견디다 보면 세월이 흐르기 마련이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이 있었기에 이 책을 썼을 것이다. 그래서 옛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 “네 인생 네가 사는 것”이라고 누가 살아주랴 오늘도 버티고 버티다 보면 그게 사는 것이다. 연애도 하고 이별도 한다. 직장에서 해고도 당한다. 유학도 간다. 유명인사가 된다. 동창회에 간다. 반려동물을 키운다. 암에 걸린다. 휴가를 간다. 신발을 잃어버린다. 반려묘도 잃어버린다. 나도 그렇다. 작가도 그렇다. 모두가 그렇다. 작가는 글쓰기로 견디는 것이다. 필용이 양희를 보러 가는 것도 견디기 위해서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견딜 수 있다. 조중균 씨도 점심을 안 먹고 견디는데 견뎌보자. 나이가 많아지면 그래서 노련해지나 보다. 우리 모두 서로를 안아주자. 필용은 안아주지 못해 사랑을 놓쳤다. 필용의 온기가 양희에게 전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무쪼록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안아주자. 그래야 사람이다.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하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고 고기가 상했다면 상했다고 말하고 죽이지 않았으면 죽이지 않았다고 말해야 한다. 정의를 위해서는 물러서지 말고 싸워야 한다. 그래야 사는 거다. 그래야 버티는 거다. 무덤덤하게 화내지 말고 진실을 얘기할 때 비로소 함께하는 세상살이가 되는 것이다. 수능을 보는 우리의 아들과 딸들에게 고생했다고 뜨겁게 안아주자. 친구들 잘 견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