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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상희 Oct 02. 2023

싸이코의 추억

남자는 쓸모가 없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일요일이었는데 EBS에서 명화극장을 보고 있었다. 제목은 <싸이코>. 어떤 여자가 급히 여관에 들어왔고 친절한 주인이 방을 안내했다. 불안한 모습의 여자는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인지 샤워를 하게 되는데 갑자기 누군가 들어오고 샤워커튼이 제쳐진 후 칼 든 사람의 공격을 받고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죽게 된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그것은 알프레도 히치콕 감독의 유명한 영화 <싸이코> 였으며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유명한 서스펜스 스릴러 걸작이었다.


어린 나이에 본 <싸이코>는 너무나도 무섭고 놀랍고 두려운 반전이 공포스러운 영화였다. 일요일이었던 그날, 내일이 오면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리라 다짐했다. 이 흥미롭고 솜털이 쭈뼛 서는 영화를 또 누가 봤을지도 몹시 궁금했다. 월요일이 되고 나는 어제 보았던 <싸이코>를 보았나 조사를 한 후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열심히 떠들어댔다.


그 여자가 사장 돈을 가지고 도망을 가다가 여관에 들어갔는데 거기에서 샤워를 하다가 꺄악---

칼을 든 사람한테 죽임을 당하고 막 욕조바닥에 피가 막 흐르고


큭큭큭

짝꿍이었다. 이 긴박한 순간에 웃었다. 아직 뒷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남아 있는데 짝꿍이 웃었다. 남녀공학이었고 1학년때까지는 합반이었으니, 남자 짝꿍이 웃었다. 기분이 나빠진 나는 왜 웃느냐고 물었다.


다 벗었겠네?

샤워하다 죽었다며

다 벗었겠네


김이 팍 샜다. 나는 그 여자가 빨개벗고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나의 설명이 얼마나 시원찮았으면 알프레도 히치콕의 <싸이코>가 빨개벗은 여자가 샤워를 하는 영화가 되어버린 거다. 그날 알았다. [남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거




명절이 되기도 전부터 차례 지낼 것과 집에 머물 친척들을 위한 먹을 것 장을 보고,  이불빨래 등등을 하고, 명절 내내 즐거운 모임을 줄줄이 갖으며 먹을 것을 만들고, 모두 떠난 다음에는 나와 있는 여러 가지 물건을 제자리로 치우고 청소하고 빨래한 후 이제 좀 쉴까 하고 싱크대를 보니 그가 배를 깎아 먹고 닦아 놓지 않아 끈적끈적한 칼이 있다. 야무지게 내린 젖은 커피 가루가 뒹굴고 있다. 찐 밤을 까먹으며 껍질을 아무 데나 버리고는 옷가지를 여기저기 벗어 놓는다. 할 일도 없어 보이는데 왜 이렇게 바쁘게 종종 거리냐며 쉬란다. 삼시 세 끼를 꼬박꼬박 대령하는 입장으로 이까짓 것 별것 아닌데 갑자기 화가 난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남자]인 그가 샤워를 할 때 문을 벌컥 열고 꺄아아악하고  비명을 지르는 시나리오를 짜봐야겠다. 깜짝 놀라 기겁하는 빨개벗은 꼴을 보고 싶은 나.

내가 싸이코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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