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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상희 Oct 16. 2023

그냥 '그렇구나'라고 말해줘

로또부부

친한 듯 안 친한 우리 부부는 오랜만에 차를 타고 대청호 주변으로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아직 가을이 덜 무르익어 파릇한 은행잎이 아쉽기는 했지만 구불구불한 길을 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했다. 대청호에 물도 넉넉하게 차서 이제 막 물드는 나무들의 그림자도 곱게 일렁였다. 


물이 많으니까 보기가 참 좋다. 


오랜만의 드라이브에 마음에도 바람이 빵실하게 들어가서였을까. 턱을 고이고 창밖을 보며 조금은 아련하게 말했던 것 같다.


여름에 비가 많이 오고 근래에도 비가 왔잖아.


가끔 나는 일부러라도 기분이 좋다고 스스로에게 세뇌를 하며 목소리를 하이톤으로 바꿔가며 분위기를 띄워보려 애쓰고는 한다. 말을 안 하면 둘이 싸운 사람들 같아서 노력 해야 한다. 애써 솜사탕처럼 뽀송뽀송 부풀어 오르려 하고 있으면 남편은 물을 부어버리는 말로 맘 상하게 한다. 

한숨 쉬며 뚜-한 마음으로 의미 없이 노랗게 빨갛게 물들기 시작하는 산을 보다가 참지 못하고 기어이 말했다.


내가, 왜 물이 많은지에 대해 말해달라고 했어?  그냥, 보기 좋다는 이야기하는 거야. 그럼 그냥, 그러게. 물이 많아서 보기 좋네 하고 말해주면 안 되나?


30년 세뇌 교육은 대단한 것이다. 남편은 별말 없이 다시 대답했다.


그렇구나, 물이 많아서 보기가 좋았구나.


피식 웃음이 나온다. 반항하지 않고 하라는 대로 말을 해주니 많이 컸구나 하며 분위기 깬 죄를 용서한다. 


아쉽것네. 일이 주만 늦게 왔어도 단풍 들었을 텐데 말이야.


남편이 내 눈치를 보며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아직 지나지 않은 것을 아쉽다고 표현하는 거 아니지. 지난 것이 아쉬운 거지. 오늘 단풍이 안 들어 서운하면 담주나 다담주에 또 오면 되는 거 아니겠어?


말을 하면서도 입바른 소리를 땍땍거리며 떠드는 마누라를 든 남편이 갑자기 안쓰럽다. 사실 나의 잔소리나 입바른 소리는 그냥 소심한 복수 같은 거다. 다행히 남편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내보낸다. 몹. 시. 감. 사. 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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