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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렇구나'라고 말해줘

로또부부

by 배추흰나비

친한 듯 안 친한 우리 부부는 오랜만에 차를 타고 대청호 주변으로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아직 가을이 덜 무르익어 파릇한 은행잎이 아쉽기는 했지만 구불구불한 길을 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했다. 대청호에 물도 넉넉하게 차서 이제 막 물드는 나무들의 그림자도 곱게 일렁였다.


물이 많으니까 보기가 참 좋다.


오랜만의 드라이브에 마음에도 바람이 빵실하게 들어가서였을까. 턱을 고이고 창밖을 보며 조금은 아련하게 말했던 것 같다.


여름에 비가 많이 오고 근래에도 비가 왔잖아.


가끔 나는 일부러라도 기분이 좋다고 스스로에게 세뇌를 하며 목소리를 하이톤으로 바꿔가며 분위기를 띄워보려 애쓰고는 한다. 말을 안 하면 둘이 싸운 사람들 같아서 노력 해야 한다. 애써 솜사탕처럼 뽀송뽀송 부풀어 오르려 하고 있으면 남편은 물을 부어버리는 말로 맘 상하게 한다.

한숨 쉬며 뚜-한 마음으로 의미 없이 노랗게 빨갛게 물들기 시작하는 산을 보다가 참지 못하고 기어이 말했다.


내가, 물이 많은지에 대해 말해달라고 했어? 그냥, 보기 좋다는 이야기하는 거야. 그럼 그냥, 그러게. 물이 많아서 보기 좋네 하고 말해주면 안 되나?


30년 세뇌 교육은 대단한 것이다. 남편은 별말 없이 다시 대답했다.


그렇구나, 물이 많아서 보기가 좋았구나.


피식 웃음이 나온다. 반항하지 않고 하라는 대로 말을 해주니 많이 컸구나 하며 분위기 깬 죄를 용서한다.


아쉽것네. 일이 주만 늦게 왔어도 단풍 들었을 텐데 말이야.


남편이 내 눈치를 보며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아직 지나지 않은 것을 아쉽다고 표현하는 거 아니지. 지난 것이 아쉬운 거지. 오늘 단풍이 안 들어 서운하면 담주나 다담주에 또 오면 되는 거 아니겠어?


말을 하면서도 입바른 소리를 땍땍거리며 떠드는 마누라를 든 남편이 갑자기 안쓰럽다. 사실 나의 잔소리나 입바른 소리는 그냥 소심한 복수 같은 거다. 다행히 남편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내보낸다. 몹. 시. 감. 사. 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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