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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상희 Nov 08. 2023

나는 눈치가 없는가

현실자각타임

작년에 꼭 수업을 해보고 싶은 곳에 지원서를 냈는데 보기 좋게 미끄러지고 말았다. 내가 얼마나 재밌게 수업을 잘하는데 나를 떨어뜨리다니, -당신들 큰 손해를 보았소- 하면서 스스로 위로한 일 년이었다. 다시 공고가 떴고 도전해 보기로 했다. 어떻게 200여 명을 뽑는다는데 안된단 말인가. 작년에 떨어진 것이 억울했지만 왜 떨어졌는지 답을 모르는 나는 서류도 철저히 준비하고 면접 시 당당한 것보다 겸손해 보여야 한다는 코치까지 받았다. 그런데 공고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원서접수 전에 직접 전화해 보기로 했다.


고졸이면 경력 3년 이상, 대졸이면 경력 1년 이상 맞지요?


엑셀자료가 있던데 그것이 왜 있는지 이해가 안돼서요.

거기에 있는 현재 수업 중인 과목과 시간을 보시고 지원할 강의를 고르시면 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수업을요?


그럼, 에세이 쓰기 강의를 지원하고 싶으면 현재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에세이 쓰기 수업 그 자리에 지원하라는 건가요?

네. 거기 있는 강의 번호, 강의명, 시간 그대로 쓰시면 됩니다.


그럼, 그 수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 내건 강의명을 그대로 쓰고 커리큘럼만 작성하라는 건가요?

네. 그럼 현재 하고 있는 수업과 지원하신 강사분의 커리큘럼등을 비교하여 내년 강사가 결정됩니다.



내가 눈치가 없는 거였다. 이것은 예의상 공고는 내지만 사람을 뽑지 않겠다는 의지가 아닌가. 강의명을 원래 하고 있는 사람이 지은 그대로 쓰라니, 커리큘럼은 강의명에 맞춰서 쓰는 것 아닌가. 어쩐지 뭔가 되게 이상했다. 번호를 쓰는 칸이 영 이상했다. 나는 접수번호를 쓰는 칸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직접 번호로 강의를 선택하는 거였다. 그것도 모르고 며칠 동안을 눈에 띄는 강의명을 짓고 커리큘럼을 짜느라 애썼었다. 


작년 여러 곳의 지원 공고만 보고 원서를 넣었다가 면접만 실컷 보러 다녔었다. 그냥,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 관련학과와 관련 자격증이 없으면 안 된다. 여자는 안된다. 등등을 써놨으면 좋겠다. 적어도 떨어뜨릴 것이 확실하면 면접 보러 오라고 안 했으면 좋겠다. 이것은 기회의 평등이 아니다. 


인문학 강의자들의 학력과 경력을 보니 언감생심 나에게 기회가 오기는 글렀다. 박사에 대학교수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많이 뽑겠다는 것만 보고 석박사에 대학교수출신이 아니어도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혼자 꿈을 꿨더랬다. 현재 강사도 포함된 인원인줄도 모르고 말이다. 기운이 쪽 빠졌다. 눈치도 더럽게 없는 나는 혼자 헛꿈을 꾼 거였다. 그냥 나는 흔하디 흔한 지원자 한 마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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