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상희 Nov 02. 2023

나는 남편을 바보로 만들었는가

바보


한 시간 수업을 하려 왕복 두 시간을 소비하지만, 저녁을 남편과 함께 먹으려고 애쓰는 수요일 저녁, 수업을 끝내고 급히 가면 8시 전에는 도착하는데 어제는 남편이 혼자 밥을 먹었단다. 내가 늦게 오는 날인줄 알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고 했다. 매주 수요일은 내가 차려주고 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나도 라면을 끓여 먹겠다고 하고 준비하는데 '헉, 소시지도 있었어? 양파도 넣는 거야?' 하면서 기웃댄다. 그가 냉장고에 무엇이 있는지 알 턱이 없다.


전날 저녁도 라면을 끓여 먹었다고 한다. 고기도 볶아 놓고 양배추도 쪄 놓았는데 라면을 끓여 먹었단다. 내가 만들어 놓은 음식의 사진을 찍어 냉장고 몇째 칸에 넣어 두었는지 이러저러하게 드시오-라고 전송하지 않으면 못 챙겨 먹는다. 요즘은 남편도 백수라 딱히 이러저러한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도 눈이 있으므로, 알아서 챙겨 먹을 거라 생각한 내가 실수한 거다.


라면을 먹으려 하니 허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냉장고에 롤케이크 좀 가져다줄까? 했더니 그런 게 있었냐고 묻는다. 있었어. 있었다고, 어제 내가 꺼내 줬었다고 이 냥반아-속으로만 말하고 감을 깎아서 롤케이크와 준다. 라면을 먹었다지만 조금은 배고파 보이는 얼굴 이어서다. 감은-깎아 먹는 거라서 내가 깎아서 잘라 줘야 먹는다. 그저 자신이 넣어 둔 맥주는 꺼내 먹을 줄 안다. 그러면서 왜 냉장고는 수시로 열어보는 걸까.


사람들은 내가 남편을, 아이들을 바보로 만들었다고 한다. 다 해줘서 그런다고 타박이다. 나는, 그냥 좋아서 한 일이다. 좋아서 음식을 챙겨주고, 좋아서 손발톱을 깎아주고, 좋아서 귀청소를 해준다. 싫은데 억지로 한 일은 없다. 나는 내가 가족을 챙기는 것이 좋다. 내가 좋아서 한 일에 대한 평가가 <바보 만들기>였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냉동고에 자신이 넣어둔 육포 옆에 아귀포가 있는 것을 까마득히 몰라서 내가 아귀포를 안주로 꺼내 놓으면 깜짝 놀라며 행복해하는 이 바보를 어쩌면 좋은가. 우선 구박을 하며 데리고 살기로 한다. 라면 먹는 사진을 이쁘게 찍어 보라고 했더니 음- 못쓰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참을성이 없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