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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 끌려가다

현타

by 배추흰나비

긴 여행을 마치고 영양실에 돌아가자 언니들은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아마도 내가 돌아올지 말지 의견이 분분했던 모양이다. 나는 가기 전에 약속을 했기 때문에 돌아왔다. 약속은 지키려고 하는 것이지 않은가.


S언니는 말하자면 나의 사수다. 요리부가 아닌 세팅부로 오랫동안 일을 했으며 영양실에서 가장 오래된 근무자라고 했다. 여행에서 언니들에게 주려고 사 온 콜라겐이 들어간 나이트크림을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더니


이제 다시 초보라고 생각하고 일을 다시 배우는 입장으로 해야 해.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문제없어.


라고 말했다. 나도 그럴 마음이었다. 사실 그동안 했던 일이 기억나지 않을까 봐 걱정도 되었지만 유니폼을 입고 모자를 꾹 눌러쓰니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언니들은 그런 나를 기특해했다. S언니는 나를 혹독하게 가르쳤는데 나는 배우는 거 좋아한다. 영양실의 세팅부와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거울을 닦는 일이라든지, 직원식당 바닥을 약을 칠하며 윤이 나게 닦는다든지 하는 일들을 마구잡이로 시켰는데, 나는 청소도 좋아한다. 청소는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S 언니는 몹시 퉁명스럽고 높고 우악스런 목소리로 나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해댔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30년을 산 사람으로 별로 부침이 없었다. 오히려 나머지 언니들이 내 눈치를 보며 '말도 안 되는 거 시키고 그러면 덤벼. 막 대들고 싸워! 그래야 안 건들어!'라고 했지만-그리고 억울한 면도 꽤 있었지만 나의 생활모토는 좋은 게 좋은 거 다여서 ㅎㅎㅎㅎ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최여사)나는 지적받는 것도 몹시 싫어하기 때문에 나에게 내려진 업무 이외의 일을 충실히 해냈다.


그러던 어느날,

병동에 식판을 수거하러 갔던 S언니가 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나를 잡아끌고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은 넓고 조용하고 추웠다. 다짜고짜


상희 씨가 그랬어? 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상희 씨가 딱 떠올랐다. 아, 얘가 한 달 동안 여행을 갔다 오더니 건방져졌구나. 그래서 주제넘게 행동하는구나. 우리가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건방지게 왜 그런 거야?


어안이 벙벙해서 듣고 있다가 무슨 이야기인지 물었다.


짧게 말하면 병동의 뒷문을 내가 잠그겠다고 했다는 거다. 영양실의 누군가가 병동의 뒷문을 책임지고 잠그겠다고 하는 바람에 지난밤 뒷문이 잠기지 않은 채로 하루가 지났고, 그것 때문에 사달이 난 모양인데 그게 나라는 거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런 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라도 진짜 내가 그랬나 하는 생각과 그런 뉘앙스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었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런 적은 없었다. 왜 나라고 생각했는지, 근거는 무엇인지, 증거나 증인이 있는 건지 물었어야 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화장실로 끌려가서는 하지도 않은 일을 추궁당하니 어벙벙해져서, 내가 왜 남의 집 대문을 잠그겠다고 했겠느냐고 멍청이처럼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그러자 진짜 아니냐고 다그치고는 자신이 다시 정확하게 알아보겠다고 하고 사라졌다.


나는 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이런 일을 시작해서 하지도 않은 일에 의심을 받고, 일을 금방 배우고 곧잘 해낸다고 이유로 건방지다는 소리를 듣고 있나.. 하며 마음이 슬퍼졌다. 태어나서 건방지다는 이야기는 처음들었다.

이튿날 S언니는 다른 언니가 범인이었다며 -그다음의 말은 당연히 사과가 따라와야겠으나- 어쨌든 영양실의 실수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자신과의 대화를 말하지 말라는 엄포로 끝을 냈다. 뭐냐, 너.


하- 사과를 받지 않았으나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고 범인이 내가 아니라니 다행이다 싶어서 그냥 조용히 넘어갔는데!!!!!!!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S언니는 우리들의 간식 중 쫀디기가 없어졌다며 영양사까지 합쳐 7명 중 딱 나를 찍어서 상희 씨가 먹었어?라고 물었다. 영양사가 자신이 모두 먹었다고 말해서 그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나는 쫀디기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간식에 관심없다.

나는 야식도 무슨 대단한 이벤트가 없으면 먹지도 않는다.


두통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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