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집을 할 때 남편은 12월이 다가오면 무거운 짐이 어깨를 짓누르는 기분이라고 했다. 크리스마스에 대비하여 얼마큼의 케이크를 만들어야 할지 가늠하고 계획하고 실천하는 것이 너무나 부담된다고 했다. 케이크가 부족해도, 너무 남아도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남편의 마음이 아마도 김장하기 전 내 마음과 같을까 싶었다. 시댁과 친정식구들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일이 무척 힘에 겨웠다. 친정엄마가 안 계시니 동생들의 김장도 해야 했고 시어머니가 안 계시니 시댁의 김치냉장고도 채워야 했다. 처음 시집갔을 때 시아버지는 '싱건지를 담아라', '집고추를 담아라' 하셨는데 사실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어서 헤맸었다. 지금은 가족이 단출해지고 김치를 많이 먹지 않아서 작년에 담은 김치가 아직도 네 통이나 남아 있지만 그래도 김장을 서른 포 기해서 나눴다. 김장도 별로 무섭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김장도 무섭지 않은 나이, 갑자기 집으로 열 명의 손님이 온다고 해도 무섭지 않은 나이가 되었지만 세상이 어찌나 빨리 변화하는지 그것에 쫓아가는 것이 무섭다. 대한민국이 가장 빠르게 발전하고 전자화되는 시기를 정통으로 맞은 세대인 나는 지금은 변화하는 세상이 마냥 신이 나지 않다. 그래도 남들보다 신문물을 빨리 받아들이는 편이기는 하지만 늘 무엇이 또 변해있을까 걱정이다. 레이건 대통령 부부가 퇴임하고 슈퍼에서 장을 보고 바코드를 찍어서 결제하는 것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내가 그런 노인이 되어 가고 있다.
12월이 되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 생각은 한참을 거슬러 어린 나를 찾는다. 12월이 되면 학교 끝나고 무조건 교회로 갔다. 24일에 있을 행사를 준비해야 해서였다. 노래와 율동을 외우고 동화구연과 연극을 준비했다. 의상도 준비했다. 엄마가 쪄 온 술빵을 가 같이 먹으며 동네 아이들 모두 모여 발표회를 준비했다. 준비도 발표도 재미있었지만 가장 기대되고 재미있던 것은 '새벽송'을 도는 일이었다.
"새벽송
24일 발표회가 끝나고 나면 모두 교회에 모여 놀다가 새벽 4시에 일어나 교인들의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크리스마스 송을 불렀다. 대부분 청소년들이 그 일을 맡았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깜깜한 밤에 꽁꽁 언 산길을 걸어 걸어 이웃마을까지 가서 새벽송을 부르는 일은 행복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한겨울에 추위를 뚫고 마을 두서너 개를 돌며 노래 부르는 일이 쉽지만을 않았을 텐데 함께여서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새벽송을 돌면 교인들이 과자나 선물을 주었다. 그것을 커다란 주머니에 넣어 산타할아버지처럼 오빠들이 메고 교회로 돌아와서 25일 예배를 마치고 나면 어린이들이 나누어 가졌다. 참. 아름다운 일이었다.
어느 해, 마을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기껏해야 2층 집이 제일 높은 줄 알고 살던 우리에게 15층 아파트는 으리으리를 넘어서 무시무시하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그곳에 집사님이 살고 계셔서 가야 한다고 했다. 7인가 8층쯤이었나 보다. 엘리베이터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타고 가면 된다고 알고는 있지만, 타보지 않은 그것에 타야 해서 걱정하고 있던 때 한 오빠가 큰 소리로 말했다.
"너희들 엘리베이터 처음 타보지? 촌스런 것들. 그냥 타면 돼. 겁내지 않아도 돼, 별거 아냐. 겁내지 마."
하며 으스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우리는 주춤주춤 엘리베이터를 탔다. 손잡이가 있어서 꼭 잡았다. 큰소리치던 오빠는 한가운데 서서 별거 아니라고 자기는 많이 타 봤다고 큰소리치고 있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막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손을 짚고 납작 엎드리는 거였다. 엘리베이터가 설 때까지 무섭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 오빠의 비명 덕분에 우리는 덜 무섭게 첫 엘리베이터 탑승을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사실 엘리베이터를 처음 타봤다고 한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새로운 문물이 생각보다 난감했던가보다.
키오스크를 처음 마주했을 때 몹시 난감했다. 쌀국수 하나 먹는 일이 어찌나 험난하던지... 화면 속 하얀 네모만 쳐다보느라 검은 테두리에 쓰여 있는 <결제> 글씨를 찾지 못해 마음이 난리법석이었다. 뒤에 사람들이 없음에도 이렇게 초조한데 말이다. 겨우 결제를 마치고 음식을 기다리는데 노부부가 들어왔다. 어떻게 하실까 몹시 걱정하고 있는데 주방에서 한 남자가 나와서 직접 주문을 받았다. 센스 있는 사장. 그래야지...
새로운 문물을 대하는 일은 늘 신기하고 재미있고 어렵고 어색하다. 처음 삐삐를 허리에 차고 버스에 탔다가 삐삐의 진동에 사고 난 줄 알고 악! 소리를 지르던 나는, 사람이 아닌 기계가 내 돈을 먹어버리고 입 싹 닫을까 봐 면대면으로만 은행거래를 하던 나는, 불꽃이 보이지 않는 전기레인지에서 물이 끓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나는 지금, 로봇 청소기와 대화를 하며(혼잣말이지 뭐) 살아가고 있다. 얼마나 다행인가. 배우는 것이 싫지 않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