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할 수 없이 하는 일이라도

by 배추흰나비

내가 팀장일 때 지점장님이 세 번 바뀌었다. 모두 스타일이 달랐고 그에게 적응해야 했다. 그냥 하던 일을 하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누구에게는 옳은 방법이나 행동이 누구에게는 맘에 들지 않는 짓일 수도 있다. 새로운 지점장님이 왔을 때 나에게 갑자기 모든 회의의 진행을 맡겼다. 사내강사로 활동하고 있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으나 내용이 정해져 있는 교육과는 진행 내용이 사뭇 달라서 만만치 않았다. 한 시간 정도 진행되는 회의의 콘셉트부터 회의 참여자 명단까지. 거기에 적절한 유머와 단호한 실적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고 싶지 않은 말들을 해야 했다. 또 한 번은 대전에서만 일했던 나에게 서산, 당진, 홍성까지 맡아서 일하라는 조직개편이 있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을 주로 하고 있었지만 낯을 많이 가리는 나는 낯선 지역, 낯선 사람들과 만나는 일조차 버거웠다. 운전을 해서 멀리 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주어진 일이니까 - 했다.


밀린 수업료를 받아오라던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교사들의 집에 가서 교사의 불참 이유가 사실인지 파악한다던가 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위에서 정한 실적에 맞춰서 무조건 해내야 하는 일은 정말 어려웠다. 한여름이나 한겨울 가릴 것 없이 파라솔을 들고나가 홍보물을 돌리고 아파트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전단지를 돌리고, 무거운 책들을 교사들 집으로 가져다줬다.


처음 지점장 발령을 받았을 때 혹은 다른 일을 시작했을 때 팀장이던 때가 자꾸 떠올랐다. 그때는 힘겨웠던 일들이 경험치로 쌓여서 어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는 나를 보았다. 팀장 생활이 길어서 힘들었었는데 그것도 나에게 낮은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져다주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되려 노력하는 내가 되었고 타 지역으로 지점장 발령을 받았어도 겁나지 않았다. 당장 일을 때려치우지 않으면 바닥으로 떨어진 자존감을 더 이상 끌어올릴 수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를 기억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수많은 경험들이 나에게 하나씩 하나씩 진주가 되어 남았다. 물론 내 딸은 그런 경험을 덜 하고 그런 상황들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굳이 어려운 일이 닥쳐서 견디고 해결하여 사리 같은 진주를 꼭 얻으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어떠한 경험도 그냥은 없다. 이유 없이 욕을 퍼먹을 때도 나중에 같은 일이 발생할 때 한마디 대거리라도 할 수 있게 한다.


인생 총량의 법칙이 있다고 한다. 행운이든 불운이든 어차피 죽을 때 보면 모두 비슷비슷하더라는 거다. 그 말은 대부분 초년운이 나빴던 사람들이 부적처럼 간직하고 싶어 하는 말이다. 아닐 것 같다. 초년운이 나빴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몸으로 각인된 여러 가지 경험치가- 쌓이고 쌓여 더 이상의 불운이 닥쳐도 빨리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내공을 갖게 되는 것이리라. 늦은 나이에 새로운 회사에 들어갔을 때 나는 못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미친 듯이 주어진 인생에 대적하며 살다가 더 이상을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죽은 사람처럼 지내 본 나는 지금 세상이 무섭지 않다. 겁나지 않다. 까짓것 이제까지 지나온 것보다 더 나쁠 것이 있을까. 그냥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경험이 쌓이고 쌓여 지금이 있을 뿐이다. 그 경험이라는 것이 불행했던, 행복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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