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

난 너무 예뻐

by 배추흰나비

갑작스런 한파로 마음이 으슬으슬하고 뜨끈한게 먹고 싶은 것이 예전 따뜻했던 봄날에 일이 생각난다.



햇살이 너무 눈부셔 눈을 똑바로 뜨고 걸을 수 없는 날이다. 거리에 나뭇잎들은 나 여기 있어요, 여기요하며 여기저기서 작은 손을 흔들고, 나는 서점에 가서 읽고 싶은 책을 왕창 골랐다. 숙제처럼 이것저것 고른 책은 열권이 넘었고 버스정류장으로 걷는 나는 서점을 나서면서부터 잔뜩 들고 가던 책을 어디 내려놓을 곳이 없나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공원에서는 겨울에 지쳤던 사람들이 해바라기를 하려는 듯 군데군데 모여 있다. 아마도 점심 식사를 마친 주변 회사원들인가 보다. 남자들은 손에 종이컵을 하나씩 들고 모여 앉아 와하하하 웃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도 책을 내려놓을 곳은 마땅치 않고 중년의 남자들이 있는 곳을 통과해 가자니 무거워서 씩씩거리는 모습을 보이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흠. 헛기침을 하고 기운을 끌어 모은 나는 아무렇지도 않는 듯 아랫배에 힘을 딱 주고 공원을 가로질러 정류장을 향해 따각따각 걸었다. 그런데 자꾸 남자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서로 툭툭 치기도하면서 나를 힐끔거린다. 내가 잘못 보았나 생각했지만 아니다. 보아하니 한 남자를 나에게 자꾸 보내려 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 한때는 나도 퍽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더랬다. 그렇다고 해도 나이 먹은 사람들이 그러면 쓰나 하면서 다시 턱을 치켜들고 걸었다. 생각해보면 아가씨 때는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에게 불쑥 삐삐 번호를 적어주고 간다거나 집 앞까지 따라 와서는 편지를 내밀기도 했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편지가 오기도 했다. 워낙에 새침한데다 말이 없어서 애간장을 많이 태웠다는 이야기도 들었었다. 지금은 펑퍼짐한 아줌마가 되었어도 저기에 모여 있는 남자들에게 내 숨겨진 매력을 들켜버렸나 하고 있을 때 그중 한 남자가 나에게로 쭈뼛쭈뼛 다가왔다. 이런 일이 처음인 듯 무척 쑥스러운 얼굴이다.

“저기....”

“무슨 일이시죠?”

최대한 매몰차고 담담하고 딱 부러지는 말투로 물었다. 꽤 멀쩡해 보이는 중년이다. 예쁜 건 알아가지고 참. 뭐하시는 건지.

“저기, 아까부터 보고 있었는데.”

늘 이런 식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식상한 맨트다. 요즘에도 이런 어휘를 쓰나 하며 다시 차가운 얼굴로 그를 본다.

“그런데요?”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저기, 지퍼가 열렸어요.”

민망한지 그는 해야 할 말을 하고는 바람같이 사라졌다. 그가 그의 무리로 가자 그들도 몹시 급하게 사라진다. 순식간에 공원은 한적해졌다. 아마도 내가 조금 더 서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빈 의자 하나를 찾아서 책을 내려놓고 보니 지퍼가 끝까지 내려가 있다. 단단히 바지를 지탱해주던 후크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아무생각 없이 걸었더라면 낭창낭창한 내 바지는 아마도 추르르륵 발 아래로 흘렀을 것이다. 그는, 쑥스러운 것이 아니라 난감해 하고 있었던 거였다. 무거운 책을 간수하느라 아랫배에 너무 힘을 주어 걸었나보다. 화끈거리는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무표정을 유지하며 지퍼를 올리고 혹시 바지가 내려갈까 종종걸음으로 택시를 잡아탔다.

생각지도 못한 시선을 받았을 때 처음부터 내 매무새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야 맞는 건데 나는 어쩌자고 나에게 관심이 있어서라고 단정지어버렸나. 예전에는 허리에는 살이 찌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울퉁불퉁한 옆구리를 괜히 퉁퉁 쳐본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그들의 눈을 테러한 것에 정중히 사과한다. 어쩌자고 햇살은 이렇게 눈이 부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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