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독일로 이사를 간 동생을 보러 갔을 때 아이들은 쑥쑥 자라 있었고 동생과 제부는 말라 있었다. 아직 1년 차인 이들은 적응하려 애쓰며 살고 있다.
동생은 결혼 전 갈라파고스에서 스페인어를, 제부는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영어를 쓰며 살았던 친구들이지만 독일어는 처음이라 힘들었던 모양이다. 지금도 고군분투 중이다. 동생이 한국에서 워낙 일에 매달려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제부의 취업으로 독일에 간다고 했을 때 잘 되었다 생각했다. 가서 좀 쉬었음 했다. 동생은 독일에 가자마자 어학원에 등록을 하며 어학코스를 마쳤다. 갸가 그런 아이다.
조카들은 아직 초등생이지만, 작은 아이였을 때나 덩치가 중학생 같아 보이는 지금이나 즈이 엄마를 어찌나 찾고, 기대고, 매달리고, 치대는지 내 동생 안 쓰러 죽겠다. 이모가 독일에 온 건 누가 내 동생 괴롭히나 보러 왔다고 엄포를 놓았다. 너희들 엄마는 내 동생이라고, 너희들 엄마이기 한참 전부터 내 동생이었다고 말이다.
동생이 결혼하기 전 우리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언제든 불쑥불쑥 찾아와서 같이 밥도 먹고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하며 놀았다. 그때는 우리 아이들도 어렸는데 즈이 이모랑 많이 싸웠다. 대부분 우리 언니를 괴롭히지 말라는 동생의 엄포였다. 특히 둘째인 아들이 늘 나를 쫄랑쫄랑 쫓아다녔는데 동생은 그걸 몹시 꼴 보기 싫어했다. 나는, 괜찮았었다.
동생이 그래도 대외적으로 교수님 소리를 듣던 위치에 있었는데 여섯 살이던 울 아들과 쌈이 붙었다.
"우리 엄마야!"
"우리 언니야!"
서로 말싸움을 하다가 울 아들이 지게 생겼던지 회심의 한방을 날렸다.
"엄마도 없으면서!!!"
어른인 동생이 여섯 살 조카한테 한방 맞곤 울고 불고 난리를 치다가 너네 엄마도 엄마 없다고 어린애처럼 비밀을 누설하고 나에게 자식 교육 똑바로 시키라고 소리치고 가버렸다. 그런 소리까지 나오도록 싸워댔던 동생에게도 한심한 마음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엄마가 없는 사람에게 '엄마도 없으면서'라는 말은 너무나도 치명적이다.
엄마가 없어서 우리는 서로에게 엄마처럼 의지했다. 우리 집이 엄마 집이었다. 동생에게는. 엄마가 없어서 서러움을 고자질할 곳이 없어서 우리는 얼마나 의연한 척 연기하며 살아야 했는지.... 엄마가 없는 아이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바르게, 착하게 살려고 또 얼마나 애썼는지... 여섯 살 아이는 그걸 몰랐다. 뭘 알겠는가. 그저 싸움에 이기고 싶었겠지.
동생의 아이들을 보며 예쁜 건 예쁜 건데 왠지 어느 순간 나도 자꾸 눈이 세모나게 떠진다. 안 그래도 힘들 내 동생을 요 녀석들이 너 힘들게 하는 건 아닌지 감시하다가 내 동생 잘 봐달라고 맛있는 음식을 해 먹인다. 우리는 자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