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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상희 Feb 02. 2023

밥 끓여 줄 여자 구합니다

삶의 목적

지난여름에 신경종으로 오른팔 아래쪽을 수술한 뒤로 시도 때도 없이 저릿저릿해진 팔이 잘 휘둘러지지 않아서 수영장에서 팔을 휘저으며 슬슬 걸어 보기로 했다. 집 근처에 국제 수영장이 있어서 결정한 일이다. 다 함께 줄을 서서 돌고래처럼 수영하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 이 몸으로 정규로 등록했다가는 정체구간을 만들 것이 뻔하므로 병목 같은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해서 자유수영을 하기로 했다.


라인을 타고 두어 번 오가자 금세 기운이 달려서 잠시 멈추었다. 자유수영을 하는 할머니들이 많이 계셨는데 주로 출발선 쪽에 모여 발끝으로 물속에서 통통통 튀어 오르며 수다를 떨었다. 저려오는 팔을 주무르며 서 있자 원치 않은 말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좋은 여자 있으믄 소개 좀 시켜줘 봐. 우리 둘째가 아직 장가를 못 갔잖아. 이제 쉰 조금 넘었는데 걱정이여.


여기까지는 그런가 보다 했다.


밥이라도 끓여주고 빨래도 해주고 할 사람이 있어야 할 거 아녀.


갑자기 기분이 상해서 할머니들을 바라본다. 할머니들은 남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누가 장가를 못 갔고, 누가 아내의 밥을 못 얻어먹고 사는지 열을 올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난 시절의 자신들의 헌신과 현재 아내들의 불성실함을 토로하며 결론은 어쨌든 '밥을 끓여줄' 누군가가 필요하니 장가를 가야 한다는 거였다. 


늙어가는 아들이 혼자 사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겠거니, 설마 밥을 해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가 부아가 치민다. 밥이 걱정이면 쌀을 씻는 방법과 밥통의 버튼 누르는 것만 알려줘도 될 것이고, 그게 싫다면 햇반도 있지 않은가! 빨래는 세탁기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다. 여자들이 모여서 여성의 지위를 한갓 가전제품에 비교하는 모습에 기가 찼다. 




어려서부터 선생님이 꿈이던 나에게 열아홉부터 작은 회사에 취직해서 돈을 버는 사람으로 만든 아빠와 새엄마는 갑자기 선을 보라고 했다. 계룡산 아래에 있는 커다란 식당을 하는 집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 집에 새엄마(새엄마가 새엄마들의 흉을 봤다)가 들어왔는데 돈을 빼돌리는 것 같다고 똑똑한 여자를 들여서 카운터를 맡길 참이라고 했다. 그것은 과연 누구의 계획이었을까 의심하고 있는데 이미 선 볼 날짜까지 정해져 있었다. 이왕이면 내가 그 집 며느리가 되어서 나에게 우리 집으로 돈을 빼돌리라는 말처럼 들렸다. 


계산기나 좋은 것으로 장만하시던가 카운터 직원을 구하라고 매몰차게 말하겠다고 별렀지만 선자리에 앉은 상대방의 표정도 떨떠름했다. 그도 결혼 같은 거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둘 다 부모의 등살에 예의를 지키려 자리에 나왔던 것뿐으로 인연은 끝이 났다. 까딱하면 남의 집 계산기 신세가 될 뻔했다.




가족이 내가 해 준 따뜻한 밥을 먹고 행복해하고, 내가 빤 옷을 깨끗하게 입고 집 밖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면 지금도 흐뭇하다. 그렇다고 가족이 나를 밥통이나 세탁기, 계산기나 커피머신 같은 가전제품 정도로 취급한다면 밥상을 엎어버리고 싶을 것이다. 여자가, 아내가, 며느리가 밥이나 끓이는 것에 삶의 목적이 정해져 있다면 얼마나 불행할까. 


할머니들의 푸념에 갑자기 열받아서 팔을 휘둘러대다가 통증을 얻어버린 나는 내일은 수영장에 가지 않아야겠다. 그냥 혼자 걷는 게 최고다. 귀가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금은 벗어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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