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장미상회 15화

연필

무명의 기록집

by 나비란

“우리 딸은 전생에 나무꾼이었나 봐.”
나는 남편에게 지유가 씹어 놓은 연필을 보여줬다. 잘근잘근 씹은 것도 모자라 완전히 반으로 잘린 연필은 속살을 드러냈다. 연필 가운데 곧게 선 흑연의 등뼈는 마치 나무속을 파고드는 것처럼 보였다. 남편과 내 시선은 연필꽂이로 향했다. 연필꽂이에 꽂힌 연필과 24색 색연필, 유성 네임펜은 지유의 이를 피하지 못하고 잇자국으로 난도질당해 있었다.

“큰일이야, 무슨 개도 아니고……”


남편에게 지유의 이갈이에 대해 하소연하다가 문득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여보, 미안해. 아무래도 지유는 나를 닮은 것 같아.”


나는 난감함과 곤란함 사이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혹은 DNA의 굴레에 빠졌다고나 할까.

돌이켜보면, 나는 어릴 때 꽤나 충동적인 아이였다.
집 전화선을 가위로 자르면 어떨까라는 궁금증은, 그날 오후 집으로 걸려오던 단 한 통의 전화도 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던 마음은, 새 학기 공책 20여 권을 모두 백설공주로 채운 뒤에야 끝이 났다.
인형을 만들고 싶던 날에는, 이불을 뜯어 솜뭉치를 반 정도 빼내야 잠이 왔다.
발가락 사이로 들어가는 솜의 간질이는 느낌은 묘하게 기분 좋았던 나의 유년 시절이었다.
만약 그 당시 우리 집이 땅과 가까웠다면, 자유낙하 실험으로 신문에 날 법한 철없는 아이였을 것이다.


수많은 충동 중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단연 연필이었다.
엄마에게 매를 맞고 벌을 서도 멈출 수 없었던 나만의 유희가, 30년 만에 딸에게서 그대로 발현된 것이다.
남편은 나에게 지유를 다그치지 말라고 말했다.


“크면 안 하겠지.”


그는 사람 좋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너도 그게 일종의 카타르시스 아니었어? 그냥 내버려 둬.”


‘그래, 나도 태우지 못할 장작개비를 많이도 팼었는데…….’


선대 나무꾼의 업적을 기리는 마음으로 그 뜻을 따랐던 건 나였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내버려두라는 말에 홀가분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리고 지유를 위한 애정 어린 조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연필을 잘근잘근 씹으면, 나뭇조각과 벗겨진 페인트가 입안을 깔끄럽게 할 거야.
그러니 나무의 결을 잘 느껴가며 씹어야 해. 그래야 도끼질하듯 패지는 거야.
일본산 향나무 연필을 씹어 보면 너도 깜짝 놀랄 거야. 정말 맛이 좋거든.


‘네가 참 좋아할 텐데……. 차마 너에게 권할 수가 없네.’


나는 불현듯 연필을 씹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입맛을 다시며 지유와 함께 연필을 씹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역시 그것은 못할 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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