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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분홍 Sep 11. 2024

고갯길을 넘어가 보자- 송정 옛길

곧 추석인데 좀처럼 무더위는 수그러들지 않는다. 한동안 기온은 높아도 습도가 높지 않아서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는데, 근래에는 가끔 소나기가 내리더니 엄청난 습도 때문에 체감기온은 더 높아진 것 같다. 이런 날씨에 고갯길이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요즘 부산에 관한 책을 찾아 읽고 있다. 동네 도서관에 가면 부산에 있는 출판사에서 나온 책만 따로 모아놓은 서가가 있는데 거기서 책을 골라보기도 하고, 도서관 홈페이지 검색창에 “부산”이라고 쳐서 마음에 드는 책을 빌리기도 한다. 최근에 발굴(?)한 책은 <부산의 고개>라는 책이다. 사실 책의 표지나 제목 모든 게 막 세련된 건 아니라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데 이건 완전 흥미로운 책이다.

저자는 지역 일간지에 부산의 고개, 부산의 길, 부산의 포구, 부산의 고개... 등을 연재한 부산의 시인이라고 한다. 요즘 내가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들에 대해 이미 오래전부터 글을 써 온 이가 있다니 우선 반갑다.

부산의 고개 이 책에는 모두 23개 고갯길에 대한 옛지도가 실려 있고, 가는 길과 함께 그 길에 얽힌 이야기가 담겨있다. 어렸을 때 우리동네 너머에 있던 배고개에 대한 글도 있어서 신기했다. 그 고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걸어서 넘어가기 힘든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 동네를 떠나온지 삼십년도 더 지나서 배고개 이야기를 읽으니 새롭다.

부산은 산이 많고, 그러니 고개가 많다. 지금은 누구도 그 고개를 걸어서 넘지 않는다. 고갯길 아래로 모두 터널이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부산광역시의 터널로 분류되어 있는 건 모두 45개이고 서울시는 27개가 있다. 아, 혹시나 했는데 역시 부산이 터널로는 서울을 이기는 구먼)

고갯길 아래 터널 길. 역사적 상상력은 공간을 통해서 완성된다.

그 옛날 한양에 과거시험 치러 가는 사람들은 고속도로도 없고 터널도 없고 그래 차도 없었는데 어떤 길을 따라 걸어갔을까? 상상해 보자. 이 산 고개를 넘어서 다음 마을을 만나고 또 다른 고개를 넘어 걸어간다. 우리 동네 길고 깊은 금정산 산성터널이 있는데, 이 터널 뚫는데 진짜 오래 걸렸다. 산성터널만 지나면 바로 낙동강이 나오는데 정말 신세계다. 그런데 백년전에는 이 마을에서 어떤 고개를 지나 산을 넘었을까...


스물셋 고개길 가운데 내가 아는 고개는 겨우 서넛 밖에 없었다. 금정산을 넘어서 낙동강으로 가는 옛길은 만덕고개를 넘어가는 것이었고 그 고개 아래에 있는 만덕터널은 그래서 오래전부터 중요한 길이었다. 동래에서 낙동강 넘어가는 중요길이었으니 일찍부터 만성적인 정체로 유명했는데, 이제 산성터널이 있어서 좀 나으려나. 책속에 있는 만덕고개의 옛 사진을 보니, 정말 저 길을 걸어넘어 갔단 말인가 싶게 깊고 긴 고개길이었다.

책을 읽다가 아, 이 길은 한번 걸어가보고 싶다 했던 길이 “송정옛길”이었다. 이 무더위에 가만히 있어서 땀이 줄줄 흐르는데, 지난 주말 고갯길이라는 말은 슬쩍 빼놓고 남편과 걷기 친구 두명을 살살 꼬셔서 그 길을 다녀왔다. 해운대 좌동 신도시에서 송정바닷가를 넘어가는 고갯길 아래에도 지금은 당연히 터널이 있다. 그 터널이 없던 시절에는 송정에서 해운대로 넘어 오려면 고개를 넘어야 했단다. 크게 높지도 않고 길지도 않은 듯하여 사뿐히 다녀올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주말 늦은 오후 이 더위에 멀쩡히 좋은 바닷길 놔두고 옛길 걸어가겠다는 이들은 정말 우리밖에 없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산길을 걷다보니 정말 그 옛날에는 호랑이라도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처음 가는 길이라 낮은 산이었지만, 갈림길이 많았고 길을 물어볼 사람도 없어서 힘들었다. 고개를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오는건 어려울 것 같아서 고개위에 있는 전망대에서 고개너머 바다 송정해변을 보고 다시 원점으로 내려왔다. 이 무더위가 가시고 나면 다시한번 도전해 볼테다. 내려오는 산 곳곳에는 군부대가 있었던 흔적인 철책선이 있었고, 탄피저장창고가 있던 자리에는 송정옛길 기억쉼터라는 팻말이 있었다.

고갯길 위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바다전망은 가파른 오르막길의 땀을 한번에 식혀주었다. 차도 없고 좋은 운동화도 없고 터널도 없는 시절에 이 길을 짐을 지고 걸어갔을 그 누군가 역시 고갯길에 올라서서 “아, 좋다”하고 잠시 쉬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날이 시원해지면, 책속의 고갯길을 따라 걸어가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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