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일기 06 - 때가 있다

우리 호박만 안 크나 봐

by 연분홍

출근하는 길가 빈 땅 경사면에 누군가 호박을 심어 놓았다. 낮은 비탈면에 서너 군데 정도 구덩이를 파고 심어 둔 것이다. 왕복 6차선에 긴 터널 진입도로 바로 옆이라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지만 날마다 출근길에 호박이 얼마나 자랐나 눈여겨보고 있다.


오늘 오는 길에 보니, 호박잎이 쑤욱 자랐다. 이런! 우리 텃밭에 심은 늙은 호박은 모종 심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데, 저 놈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잘 자라고 있으니 괜한 부러움이 생긴다.


경사면이 남쪽을 향하고 있고 도로가 바로 옆이라 가리는 것도 없어서 햇빛이 잘 들어서 그런가? 아니면 적절한 때에 좋은 거름을 하고 잘 심어서 그런 걸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우선 우리 밭에 호박 심은 자리는 밭의 가장 안쪽에 그늘진 곳이다. 예전에 보니 호박은 주로 밭의 중심부에 심지 않고 가쪽이나 경사진 밭비탈에 심는 것 같아서 나도 그렇게 했다. 호박은 아무 데나 심어도 그냥 막 잘 자라는 줄 알았다.

호박 심었던 날 몹시 추웠다. 밭이 생겨서 기쁜 마음에 이렇게 추운 날 심으면 냉해를 입어서 잘 안 자란다는 말을 듣고도 그냥 심어버린 내 탓이다. 냉해를 입은 것인가 ㅜㅜ

저 맨 끝에 안 보이는 곳에 우리 호박

우리 밭 호박보다 거의 한 달은 늦게 날이 완연히 따뜻해진 어느 날 저 대로 가에 심은 호박은 하루가 다르게 크고 있는 걸 보니 이제야 그 말의 뜻을 알겠다.

무엇이든 다 때가 있다는 말이 이렇게 와닿기는 처음이다.

천천히 가는 것이 더 빠르게 가는 길일 수도 있다는 걸 마음에 새겨둔다.

늙은 호박도 다 때가 있고 초보 텃밭농사꾼이 배우는 것도 다 때가 있다.

(텃밭 가꾸기 인터넷카페에서 지금부터는 밤 기온도 15도가 넘는다고 한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낮기온만 보는 게 아니라 밤기온도 봐야 한다는 걸 또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