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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연호 Sep 12. 2019

술 먹고 글 쓰기

약 빨고 쓰는 것 보다야..

대부분의 경우, 술을 먹고 무언가를 하는 것은 좋지 않다. 대표적으로 운전이 있겠다. 음주운전은 잠재적 살인 행위다. 헤어진 첫사랑에게 전화를 하는 것도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차단당할 확률이 높다. SNS에 갬성 글을 쏟아내는 것도 흑역사 생성의 단골 소재다. 하나같이 술이 깨고 정신을 차린 뒤에 땅을 치고 후회할 일들이다. 술을 먹었으면 수다나 실컷 떨고 맛있는 안주나 집어먹다가 늦지 않게 집에 들어가 얼른 잠드는 것이 최선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술에 취했을 때 하면 좋은 도 분명히 있다 (일단 외국어 능력이 일시적으로 향상된다). 맨정신에는 하지 않던 다양한 생각들을 머릿속에 마구 떠올리는 것이 그중 하나다. 정말 오글거리고, 중2병에 걸린 듯한 허세 가득한 문장도 이것저것 떠오른다. 마침 집에서 혼자 얌전히 술을 먹는 경우라면 그것들이 남에게 피해를 끼칠 일도 없다. 기분 좋은건 덤이다




나는 전문 작가도 아니고 재미 삼아 브런치에 글을 써서 올리는 사람이지만, 종종 괴로움을 느낀다. 글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 그렇다. 글을 쓰는 과정을 한번 생각해 보자. 아마 노트북에 앉아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한 문장을 쓰고 이윽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다. 실제로 누군가는 그렇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 같은 경우는 일 하는 시간, 출퇴근하는 시간, 밥 먹고 빈둥거리는 시간 모두 '글 쓰는 작업'의 한 부분이다. 길을 걸으며, 일을 하며 머리로는 어떤 주제에 관해서 글을 써 볼까 생각하고 대략적인 내용과 전개를 구상한다. 이 작업이 끝나면 글쓰기의 70%는 끝났다고 본다. 즉 글감을 떠올리는 과정이 가장 핵심적이고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리에 앉아 노트북으로 줄줄 쓰는 일은 차라리 쉽다




흔히 아주 뛰어난 작품이나 음악을 만들어낸 것을 보고 '약 빨고 만들었다'는 표현을 쓴다 (어감이 좋지는 않다). 약을 빨아본 적이 없어서 그것이 무슨 느낌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끝없이 새로운 영감이 솟구치는가 보다.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손에 스푼을 쥔 채 잠들었다가 스푼이 떨어지는 소리에 깨는 찰나, 꿈속에서 본 장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처럼 글을 쓰든 음악을 만들든 그림을 그리든, 무언가를 창작할 때 그 모든 것의 출발인 '영감'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니 아티스트들이 약을 빨고, 천재 달리도 숟가락을 손에 쥐고 잠드는 괴상한 짓을 했을 것이다. 고작 이런 글 쓰면서 살바도르 달리까지 들먹이려니 스스로 겸연쩍긴 하다




어쨌거나, 바로 여기서 '술 먹고 글 쓰기'의 진가가 발휘된다. 래퍼들에게 대마초가, 달리에게 숟가락과 꿈속 상상력이 있었다면 나에게는 장수막걸리가 있다 (장수막걸리는 녹색 뚜껑과 흰 뚜껑이 있는데, 녹색은 수입산 쌀 흰색은 국산 쌀이며 흰 뚜껑이 100원 더 비싸다). 무언가 새로운 글감에 대한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 나는 거침없이 장수막걸리를 들이켠다. 그리고 떠오르는 온갖 생각들을 노트에 옮겨 적는다. 이 글의 제목은 '술 먹고 글 쓰기'지만, 사실은 글 쓰기 전 글감 떠올리기 부분까지만이 음주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잠에서 깨어 노트의 메모들을 보고 쓸 만한 글감을 주워 담는 것이다




이 방법을 쓸 때 위험성이 있긴 하다. 글의 첫 부분에 쓴 바와 같이 취함의 정도를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했을 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노트가 아니라 SNS나 카카오톡에 다이렉트로 싸지르게 되는 경우다. 다년간의 혼술 경험이 있는 나 같은 경우는 만취로 넘어가기 직전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시작할 때 음주를 중단한다. 사실 꽤 어렵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 권할 만한 방법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며칠 전 음주 상태에서 쓴 메모에서 착안한 것이다. 게다가 술을 먹을 핑곗거리도 되니 나에게는 참 좋은 방법이다.




이렇게 짤막한 한 편의 글을 완성했다. 다음 글감이 떨어졌다. 하지만 괜찮다. 오늘 이 글을 쓰리라 마음먹으면서 냉장고에 채워둔 장수막걸리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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