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 땅에 불쑥 찾아든 어린 날의 기억

눈 덮인 독일 산골에서 태백을 추억하며

by 나흐클랑

얼마 전 독일 전역에 이례적인 폭설이 내렸다. 와중에 우리 동네는 튀링엔 북부, 하르츠 산맥 어귀에 자리한, 존더스하우젠이라는 산골 동네라 눈보라가 아주 매서웠다.


눈에 파묻힌 산골과 빨간 기차. 덕분에 이 그리운 조합을 여기서 본다. 어릴 때 나는 방학만 되면 청량리에서 강릉 가는 빨간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태백 외가에 가곤 했다. 태백역이나 철암역에 내리면 할아버지나 이모부가 차로 데리러 오셨고, 그때부터 내가 할 일은 먹기와 놀기, 좀 커서는 쉬기 뿐이었다.


‘태백 시청 공무원들이었으면 벌써 다 치웠을텐데..’ 같은 생각을 했다.

특히 겨울방학에 간 태백은 그야말로 딴 세상 같았다. 아니, 가는 길부터. 제천 지나 영월 사북 들어서면 누가 말 안 해도 강원도에 들어왔구나 싶을 정도로 눈 덮인 풍경이 이어졌다. 민둥산, 고한, 추전.. 역 순서를 대충 외우고 있던 나는 그래도 어쩐지 ‘태백’이라는 이름이 겨울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더랬다.


눈썰매를 끌고 어딘가로 향하는 가족들의 모습 역시 정겨워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에 내게 생긴 핵심 기억들이 참 많은 것 같다. 눈 덮인 탄광 사택촌, 멀리서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철도 소리, 차를 타고 구문소 옆을 지나가며 이무기 따위를 상상했던 일.. 별 것 아닌 장면들이 지금도 문득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버지와 태백산을 오른 적도 있었고, 당골에서 열리는 눈꽃축제는 정말 많이 갔었다. 좀 크고 나서는 어머니의 모교도 같이 구경 갔었지.


눈 덕분에 간만에 추억에 잠겼다. 공교롭게도 눈에 파묻힌 존더스하우젠 역시, 한 때 소금 광산으로 먹고살았던 곳 아니던가. 아무튼 먼 이국에서 잠시나마 익숙한 감각을 떠올릴 수 있게 한 내 어린 시절에 감사. 도이체반의 지역급 열차가 빨간색인 것에도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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