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덕골 이선생 Jan 08. 2024

비우지 말고 채우자

한때 시나리오 작가를 꿈꿨다. 아카데미 기초반, 전문반, 연구반을 거치며, 교육 과정을 이수했다. 전문 강사의 지도 아래, 극본과 시나리오 창작법을 배우는 게 흥미로웠다. 연구반 수업은 서로의 작품을 읽고 평가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그 과정에서 좋은 작품이 탄생됐다. 한 친구영화사에 원작을 팔아 입봉 했고,  선배는 공모전 당선된 뒤 드라마 제작 참여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막연했다. 그저 영화 보는  좋았다. 영화가 취미가 아니라, 일이면 싶었다. 내가 만든 캐릭터가 실존하는 것처럼 신기했다. 그러나 내 작품이 어떤 점에서 다를까. 그들은 되는데, 나는 안 될. 그런 진지한 고민은 없었다.  

  당시 선생님이 마르도록 한 말이 있다. 10편만 써봐라. 답이 나올 .  나는  새겨듣않았다. 그저 친구들과 어울려, 영화 보고 글 쓰는  즐거웠다. 결국 4편의 미발표작과 함께 시나리오 지망생이라는 타이틀만 남겼다.  모든 경험은 창작아닌, 글쓰기 지도의  방편으로 쓰였다.



(삼원스케치북, 스텐들러 피그먼트 라인펜)

나는 인물스케치가 가장 어렵다. 첫 번째는 신체 비율이나 동선을 연출하는 게 쉽지 않다. 인체는 비율에 따라 그 형상이 판이하게 달라지니, 아차 하는 순간에 바뀐다. 두 번째는 얼굴이다. 각도, 표정, 주름 등의 디테일을 잡는 게 어렵다. 한 번에 많은 사람을 그려야 할 때는 더욱 힘들어진다. 사람의 완성은 얼굴이라는데, 각각 개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난감해질 때도 있다.

(삼원스케치북, 스텐들러 피그먼트 라인펜, 색연필)


  첫날 사람의 이목구비를 그려 넣지 못했다. 한 번의 실수로 버려질 신세가 될까 봐, 신중에 신중을 기하다 포기했다. 일주일 간 똑같은 인물을 반복해서 그렸다. 그리는 대상이 늘어날수록 두려움의 무게는 점점 줄어들었다. 낯섦을 익숙함으로 바꾸는 순간 자신감이 생겼다. 그릴 때마다 다른 캐릭터를 만났고, 마치 실존하는 인물처럼 반가웠다.




학생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 중 하나가 분량 맞추기이다. 원고지 분량을 다 채우지 못하고 제출하는 친구들에게 "왜 비웠을까?"하고 물으면, 대체로 두 가지 방식으로 답한다. "도저히 생각이 안 나요"이거나 "선생님, 여백의 미라는 게 있잖아요"이다. 전자의 경우는 "왜 그랬을까? 어땠을까?"로 다시 질문하면 된다. 가령 중세 흑사병과 관련해 자신의 생각을 남기는 경우라면, "중세 사람들과 현대인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전염병을 대하는 방식에서 말이야.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대하는 사람들에게서 힌트를 얻어보자"라고 말한다.

  후자의 우라면 좀 더 길어진다. 이를 테면, '채움의 미학'을 깨달은 후에야 '비움의 미학'을 알게 될 것이니, 일단 채워보자고 설득한다. 다양한 어휘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요령이 생길 때까지 채워 보는 것이다. 미사여구를 잔뜩 끼워 넣어봐야, 여기저기 군더더기가 보인다. 그 뒤 불필요한 어휘를 하나 둘 덜어내는 과정에서 비움의 미학을 맛보게 된다. 다만 지나친 채움은 갑갑함을 주고, 과도한 비움은 빈약감을 준다. 채움과 비움의 조절만이 키움의 진폭을 넓힐 수 있다. 이를 위해 많이 보고, 자주 쓰고, 여러 번 고쳐야 한다. 습작과 훈련만이 완성미를 높일 수 있는 길이다.


비우지 말고 채우자

학창 시절 나는 황순원이나 현진건 작품에 빠져, 그들을 동경해 마지않았다. 그들의 세련된 문체가 부러웠지만, 따라갈 능력이나 경험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만한 역량은 내겐 다.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더 이상 그들을 모방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면서, 나만의 향을 입히는 거다. 그러면서 되뇐다. 언젠간 나이 생길 거라고. 

 

이전 05화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