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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덕골 이선생 Jan 15. 2024

나무가 아닌 숲을 보자

 <존재론>은 꽤 인기 있는 강좌였다. 당시 인지도 높은  교수님의 강의법은 유명했다. 과목명과 상관없이 한 가지 주제를 문답식으로 가르쳤는데, 가장 기억 남는  '애지욕기생(愛之欲其生,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이 살게끔 하는 것)'이다. 공자의 <논어>를 언급하진 않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와 절충하는 내용이었다.

  질문은 이랬다. 한 송이 들꽃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 꽃을 대하는 사람의 행동에서 답을 찾아보자. 첫째 온갖 풍파가 두려워 그 꽃을 화분에 심어 오는 사람, 둘째 환경적 조건을 만들어주며 마당에 옮겨 심는 사람, 셋째 존재 자체를 지켜보며 매일 산에 오르는 사람이다. 이들 중 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20살 첫 강의는 나에게 놀라움이 되었고, 4년 내내 그의 전 강의를 수강했다. 졸업 후 교수님을 다시 만난  대학원 면접 때였다. 당시 나는 문예사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는데, 내 이력을 보고 "수고료는 받고 있느냐"라고 물으셨다. 진학과 관계없는 질문에 당황했는데, 그의 의도를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삼원스케치북, 스텐들러 피그먼트 라인펜, 신한물감)

꼬박 4개월이 지났다. 사물을 보고 종이에 옮기는 일이 그리 어렵지 다. 라인에 이중선을 넣거나, 명암을 표현하는 게 재밌다. 그래서인지 전체 구도를 잡고  대상을 묘사하는 두렵지 않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나만의 방식이 자리 잡힌 듯하다. 라인펜 다루는 걸 보면, 개성이 드러난다는 평가이다.

  다만 계단터치가 너무 거칠다. 명암 표현이 부족하다는 의견, 점층 효과를 넣다 보니  투박해졌다. 나뭇잎 하나에 색을 달리하려다, 오히려 복잡해졌다. 사물 하나집착한 나머지 전체 이미지를 생각하지 못했다. 

  얼핏 보면 잘 된 그림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거다. 그 이유는 숲을 보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각 대상에 신경을 쓰다 보니 전체 밸런스가 맞지 않아 아쉽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계단 이미지에서 이질감이 느껴진다.


고입 진학을 앞둔 학생이 있다. 얼마 전부터 수능 준비로 국어학원을 등록했단다. 매주 나를 만나면 학원 일화를 전하곤 하는데, 대체로 논술 수업이 학교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수업 시간에 작품 이해도가 높아, 선생님께 주 칭찬을 듣는다며 뿌듯해했다. 그러면서 읽지 않은 소설이 지문으로 나오불안한 마음이 든다며,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 국어 학습이 목표는 아니지만, 학교 공부에 도움이 된다니 참 다행이었다.

  몇 년 전, 나는 한 어머니와 쟁을 벌인 적이 다. 논술을 1년 배웠는데, 누나와 비교했을 때 부족하다는 거다. 딸은 상도 탔는데, 아들은 눈에 띄는 결과물이 없어 섭섭했나 보다. 나는 "비교 대상부터가 다르다. 교육이란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획일화할 수 없다. 어휘 수준이나 학습 의지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진다. 긴 시간 훈련과 습작을 통해 이뤄 가는 것이다. 1주일에 한번 자기 습작이 얼마나 이루었는지가 더 중요하다" 등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대략 "00 어머니, 00 누나가 글을 참 잘 쓰나 보네요. 근데 00잘 씁니다. 저는 아이들 실력을 알잖아요. 앞으로 책 많이 읽고 과제 더 성실히 하면 발전할 수 있을 거예요"하고 답했다. "왜 숲을 보지 못하느냐"는 말이 턱에 닿을 정도였지만, 차마 입을 떼지 않았다. 가끔은 말하지 않아야 더 좋을 때가 있다. 무슨 일이든 빨리 해결하 망치는 경우가 있으니, 몸소 체험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보자

나는 해마다 고등 진학을 앞둔 학생들과 이별한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저에게 글쓰기 수업은 휴식이었어요. 책을 읽으며 소통하는 시간이 좋았고, 글쓰기 실력이 향상되어 뿌듯했습니다"하고 인사를 한다. 이에 권태와 불안을 이겨내고, 주체적 인간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한 권의 책을 선물한다. 그들이 살아가는 동안 선택에 자유롭길 바라며, 나는 크게  흔든다. 이내 그들은 "놀러 와도 되죠?"라며 작별인사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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