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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덕골 이선생 Jan 29. 2024

영혼의 쉼터를 만들자

5년 전 일이다. 한 외국인이 한국말로 길을 물었다. 나는 횡설수설 답하다가, 순간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왜 서 있는지를 잊고 말았다. 마치 공간과 내가 분리된 느낌, 온몸을 감쌀 듯 달려드는 불안감에 혼란스러웠다. 한동안 존재 자체를 잊고 꽂아놓은 보리자루처럼 덩그러니  있었다. 나는 정신이 번뜩 들어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고. 그는 괜찮다며 손짓했다.

  번아웃 증후군. 과도한 직무에 극도의 피로감을 느껴, 삶의 의미 상실, 무기력에 빠지는 현상을 말한다. 주로 어떠한 무를 끝낸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발생한다. 나는 여러 일을 병행하는 상태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 없이 바빴다. '나'로 사는 것보다 '누군가의 무엇'으로 사는 데 더 몰두했다. 나의 지친 영혼을 달래줄 여유조차 없었다.  

  박사 논문 완성본을 제출하는 날이었다. 몇 년간의 결과물이 내 손에 있다는  뿌듯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공허함에 마음이 허했다.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복합적인 감정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뒤로 년간은 책을 읽지 않았다. 공허한 감정을 이용해 뭔가 채우 하지도  않았다. 그저 하던 일을 하나씩 줄여 나갔다. 진정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삼원스케치북, 스텐들러, 신한물감)

사무실을 주택 단지로 이전했다. 심리적 안정을 찾기 위해 1년 넘게 식물을 키웠다. 온갖 식물을 키우며, 그들의 생명력에 감탄했다. 꽃과 식물에 몰두하는 게 좋았고, 상추, 고추, 피망, 토마토를 수확하 재밌었다. 친구에게 "심리적 불안은 버리고 기미를 얻었다"너스레도 떨었다.

  식물을 그림으로 남겨보라는 지인의 말에 힘을 얻었다. 가볍게 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동안  잘 그려보겠다며 아등바등 오기를 부렸다. 심리적 안정을 위해 시작한 일이었는데, 또 다른 스트레스를 만들고 있으니.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그리는 거 자체에 의미를 두겠다는 초심은 사라졌다.

  나에게 다시 주문을 걸었다. 미적 완성도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그리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 욕심을 버리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런저런 생각을 접어두니, 어느새 바다가 생겼고, 저 멀리 바다새도 보였다.


작년 5월 보이스톡으로 걸려온 전화. "선생님, 잘 있어요?" 반가운 음성이 들렸다. 스승에 날이라 연락했다는 그는 6년간 인연을 맺은 나의 제자다. 그를 처음 만난 건 4학년 꼬맹이 시절이었다. 매주 책을 잃지 않아 혼나면서도, 수업에 빠지지 않았다.  이상했다. 수업 자체를 거부하는 일은 있어도, 매주 잔소리를 들으러 오는 학생은 처음이었다. 뒤늦게 그 친구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바쁜 어머님 곁에서 독립적으로 자란 친구였다.

  가끔 생각지 못한 행동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언젠가 청바지가 몸에 끼여 불편하다며 툴툴 대더니, 원고지를 던지고 나가버렸다. 매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 친구 덕분에, 학생을 대하는 나노하우는 쌓여 갔다.

  그는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수업이 끝난 이후에도 매주 나를 찾아왔다. 아메리카노 커피  잔을 들고, 30분의 짧은 만남에 만족하며 돌아서던 그. 미국으로 떠난 지 몇 개월이 흘렀을까. 장발을 한 청년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부쩍 살이 빠진 그 친구의 얼굴을 보니 가슴이 찡했다. 훤칠하고 씩씩하게 커주어 대견한 마음이 더 컸다.

  그날 "책 읽기가 싫다면서도 나한테 온 이유가 뭐냐"라고 물었다. 그냥 소통하며 마음을 나누는 게 좋았단다. 가장 기억 나는 건 한 줄 남은 김밥을 나눠 먹으며, 역사 공부 하던 날이란다. 그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했다. 그저 수업 오는 자체가 좋았다며, 한국 오면 다시 찾아올 거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영혼의 쉼터를 만들자

마음의 쉼터는 삶의 원동력이 된다. 인생을 성찰하고, 미래를 위한 동력으로 쓸 수 있다. 이에 자신이 원하는 걸 알고, 이를 실천할 기회를 가져한다. 일상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자. 이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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