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외곽지역을 관통하는 복하천은 남한강에서 갈라진 국가하천이다. 이제는 작은 하천으로 변했지만 이천을 대표하는 하천이다. 복하천과 3번 국도가 만나는 지점에 커다란 오비맥주 공장이 있다. 내가 이천에서 살기 시작했던 10살 무렵에도 있었으니 역사가 꽤 오래된 공장이다. 한때는 이천쌀보다 더 유명한 핫 플레이스였다.
어린 시절 여름이면 복하천에서 수영도 하고 물고기를 잡으며 보냈다. 집에서 복하천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걸렸다. 친구들과 함께 구식 튜브며 족대를 들고 복하천으로 가는 것이 생활이었다. 겨울이면 복하천은 미군들의 집합장소였다. 팀스피리트 훈련이라도 하는 날이면 복하천을 따라 미군 텐트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어린 마음에 미국 과자를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기웃기웃하였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쵸코렛또 기부 미’의 주인공이었다.
아버지는 오비맥주 공장에서 일하셨다. 새벽에 일찍 출근을 하시고 저녁 늦게 퇴근을 하셨다. 오비맥주 공장이 한창 잘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맥주란 것이 생소했던 어린 시절이라 무엇을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봉급날에 아버지는 통닭과 쎔베 과자를 커다란 봉지에 들고 오셨다. 아버지의 봉급날은 언제나 기다려졌다.
아버지가 퇴근을 하신 어느 날, 종이 몇 장을 주시면서 ‘이게 야구 회원 가입하는 거야. 여기에 이름하고 주소 적어서 줘. 야구모자 하구 옷도 준데.’ 아버지도 야구가 뭔지 모르시는 것 같았다. 아마도 회사에서 기족들에게 야구 회원 가입을 하라고 한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주신 종이에 필요한 사항을 적고 나니 종이의 제일 아래 부분이 보였다. ‘OB 베어스 어린이 야구 회원 모집’ 그렇게 OB 베어스와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어린이 회원 가입을 하고 며칠 뒤 집으로 소포가 배달이 되었다. 풀어 보니 OB 베어스 마크가 선명한 잠바와 모자 그리고 작은 선물들이었다. 선명한 OB 베어스 마크가 너무나 좋았다. OB 베어스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마크가 붙은 잠바가 너무 좋았다.
며칠을 그 잠바며 모자만 쓰고 다니며,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고 다녔다. 마크가 달린 옷이라고는 형들이 입고 다니던 교복이 전부였는데, 색깔이 교복의 검은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화려했다. 어린이 회원이 되었다는 뿌듯함도 함께 했다. TV에서 광고하는 프로야구 개막에 대한 정보를 유심히 봤다. 야구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지만 열심히 야구에 대해 알아보고 다녔다. OB 베어스 어린이 야구 회원이라는 자부심에서 그랬을까?
프로야구 원년의 일들은 여전히 생생하다. 처음으로 미국의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에 대해 들어본 것은 OB 베어스 투수 박철순 때문이었다. 미국 야구를 했다는 박철순 투수가 나에게는 영웅이었다. OB 베어스가 게임에서 이길 때마다 항상 박철순 투수가 있었다.
그의 이국적인 외모 또한 나의 영웅으로 모시기에 충분했다. TV에 나오는 그의 모습은 빠지지 않고 봤으며, 가끔 신문에 나오는 모습을 잘라서 모아 두기도 했다. 원년 프로야구의 최고봉은 코리안 시리즈였다. 삼성 라이온즈와의 코리안 시리즈 6차전, 9회 초 2사 만루 상황에서 홈런을 날린 김유동 선수를 잊을 수 없다. 허공을 가르던 만루홈런 볼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결국 OB 베어스는 프로야구 원년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나의 팀이 우승을 하며 점점 더 프로야구의 마법에 빠지기 시작했다.
프로야구가 침체기를 겪은 때도 있었지만 여전히 난 베어스를 좋아한다. 그들이 펼치는 뚝심의 야구를 좋아한다. 항상 승리를 할 수는 없지만 실패에서도 그들의 투지를 볼 수가 있어 좋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오롯이 하나를 오랫동안 좋아한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 본다. 베어스 말고는 없는 것 같다. 그만큼 언제나 베어스는 나에게 희망을 주었고, 행복을 느끼게 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짧은 인생을 불행으로 채우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 어리석음에서 빨리 벗어나는 결심이 필요하다. OB 베어스가 나에게 준 희망을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