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도시락

엄마의 잔소리는 약이다.

by 원영대

초등학교 4학년 겨울방학이 끝나갈 때쯤 나는 고향인 제천을 떠나 경기도 이천으로 이사를 했다. 부모님이 공장 일을 하러 먼저 이곳으로 오셨고, 우리는 방학을 마치고 모두 이사를 하게 되었다. 할머니와 두 동생을 데리고 이천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집을 살 돈이 없던 우리는 이천 읍내에 있는 작은 월세방 두 개를 얻어 살림을 했다. 당시 지방에서 도시로 올라온 많은 사람들이 집을 구할 형편이 되지 않았고, 때문에 월세나 전세를 살아야 했다. 그나마 전세를 얻는다는 것은 고향에서 논밭을 팔아 여유가 있던 사람들의 경우였다.


우리 집은 기역자 모양으로 지어져 있었고, 각각의 모서리에 방이 하나씩 있었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는 방 두 개를 얻었다. 부모님과 할머니 그리고 아이들 셋이 함께 살아야 했으니 방 두 개가 필요했다. 대문이 없는 집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작은 창고가 있고 그 옆에 마중물을 부어야 물을 올릴 수 있는 펌프가 있다. 여름이 되면 펌프질을 해서 올린 물로 바닥이 흥건할 때까지 물싸움을 했다. 이를 지켜보던 주인아주머니의 불호령은 너무나 무서웠었다.


엄마와 아버지는 새벽부터 일터로 나가셨다. 우리가 잠에서 깨어날 때쯤에는 이미 일을 하러 나가신 뒤였다. 모든 학교 준비와 도시락은 모두 할머니와 우리들 몫이었다. 난 엄마가 도시락을 싸주는 다른 아이들이 무척 부러웠다. 도시락은 언제나 할머니께서 준비하셨으며, 반찬은 김치와 단무지가 전부였다. 하지만 나는 도시락에 대한 어떤 불평을 하지 않았다. 도시락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나도 엄마가 싸주는 도시락을 먹고 싶다.’


내겐 언제나 엄마의 도시락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다. 친구들의 엄마가 정성스럽고 예쁘게 싸준 도시락을 보면 언제나 부러웠다. 나도 엄마가 싸주는 도시락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그 소원은 이루지 못했다. 엄마는 아들의 도시락 한번 준비해주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도시락은 늘 할머니께서 준비를 해주셨고, 고등학교는 집을 떠나 기숙사가 있는 구미에서 다녔으니, 엄마가 나의 도시락을 싸줄 기회가 없었기도 했다.


“너는 다른 애들이랑 상황이 달라. 다른 애들이 하는 것을 모두 할 형편이 안돼, 그리고 넌 장남이니까 동생들을 잘 보살펴 줘야 해.”


어려웠던 시절 엄마가 내게 항상 하셨던 말씀이다. 그때는 그 말이 너무나 싫었다. 난 겨우 열다섯 살이었고, 나는 다른 애들이 하는 모든 것들을 그저 바라만 봐야 했다. 우리 집이 가난한 것에 대해 화가 났고, 짜증이 났고, 그리고 내가 미워졌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부정할 만한 나쁜 행동이나 잘못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생활을 인정하고, 순응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에만 매진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그 시절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모든 것이 넘쳐나는 지금, 전화를 하고 버튼만 누르면 먹고 싶은 모든 것들이 집 앞까지 배달이 되는 세상이다. 힘들여 도시락을 싸지 않아도 영양사가 건강을 고려한 식단으로 만든, 뜨거운 김이 나는 점심을 언제나 먹을 수 있다. 어린 시절 도시락으로 부의 계급을 정하던 시기를 되새김질하는 것이 나이 먹은 꼰대질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시절을 겪어오면서 평등에 대한, 인간에 대한 존중의 중요성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음력 8월의 보름달이 차오르는 지금, 엄마의 도시락 싸는 소리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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