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다니면서 사표 쓰지 말고 책쓰자
1993년 3월 2일. 30개월간 복무했던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생으로 다시 학교에 들어섰다. 낯선 건물과 도서관 앞 계단은 3년 전 그것과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다. 내가 이곳을 다녔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겨울 추위가 완전히 물러가지 않은 날씨 탓인지 저녁이 다 된 캠퍼스는 다소 쌀쌀했다. 정문에서 가장 가까운 인문대 건물 지하로 갔다. 지하 1층에 있는 조그만 식당에 들러 라면을 주문했다. 350원. 내가 이 식당을 자주 찾는 이유다.
내 전공이 전자공학이라 대부분 수업은 공대 건물에서 받는다. 가끔 교양 수업을 듣기 위해 인문대 건물로 오면 왠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진다. 빼곡한 수식과 산수보다 어려운 수학 공식에 묻혀 있다가 내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일까? 아니면 숫자가 아닌 글로 이야기를 하고 주제 토론을 할 수 있어서였을까? 어찌 되었든 나는 공대 건물보다 인문대 건물이 좋았다.
공업계 고등학교를 다니고 전자공학을 전공으로 대학을 다닌 내가 전공서적이 아닌 책을 만날 기회는 적었다. 전자회로를 분석하고 실습을 해야 하는 시간이 많았다. 가끔은 잔디밭에서 막걸리도 마셔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한 회사에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 학교를 다녔다. 남들보다 시간을 잘 활용해야 했다. 오전반 근무를 마치면 오후 2시이고 지하철을 타고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학교에 도착하면 4시 전후가 된다. 학교까지 가는 동안에는 줄곤 피곤함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햇살이라도 좋은 날이면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치지 않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피곤함을 버텨야 했다.
새로운 학기에서 수강신청을 했을 때 교양 과목에 대한 선택을 할 수 없었다. 3년 동안의 군 복무 시절이 교양 과목에 대한 감각을 지워버렸다. 어떤 교양과목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해 무지했고, 오로지 친구들이 선택하는 과목을 따라 신청을 했다. 하지만 철학 관련 과목과 문학사 과목은 필수로 포함했다. 같이 학교를 다닌 친구들이 학점도 따기 어렵고 책 내용도 어려운 과목을 왜 선택하냐고 잔소리를 해댔지만 내겐 철학과 문학사가 전공보다 더 끌렸다. 오래전부터 내 마음속에 있던 꿈을 이루어 줄 수 있는 과목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회사일을 마치고 학교에 들어오면 정문 오른편에 있는 잔디밭에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무언가 열심히 토론을 하며 깔깔깔 웃기도 했다. 그들은 적어도 공대생은 아니었다. 공대생은 정문 앞이 아닌 공대 건물의 어두운 뒤편이나 대도서관 계단 아래가 집합 장소였기 때문이다.
제대를 한 후 첫 학기 동안의 학교 생활은 어려웠다. 회사를 다니면서 함께 학교 생활을 해야 했고, 저녁 10시 5분에 수업을 마치면 마지막 지하철이 다니는 시간이 11시 50분까지 노량진역으로 가야 했다. 대학 생활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힘들고 지친 일이다. 새벽부터 피곤함을 이기고 회사 업무를 하고, 다시 학교에서 생활을 한다. 하루가 끝나면 자정이 가까워진다. 이런 생활 속에서 내가 꿈을 키웠던 것은 글쓰기와 문학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회로 실습이 끝나는 저녁 늦은 시간에 기숙사로 돌아와서는 공책에 쓰고 싶은 글을 쓰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썼다. 글을 쓰는 시간만큼 행복한 시간은 없었다.
대학 선택을 할 때에도 전자공학과 국문과의 선택을 놓고 오랜 시간 동안 고민을 했다. 내 꿈이냐, 현실이냐. 결국 꿈이 현실에게 졌다. 내 꿈을 선택하는 용기가 없었다. 남들의 시선이 두려웠고, 꿈을 선택하기에는 치러야 할 비용이 너무 많았다. 내가 전자공학이 아닌 국문과를 선택했다 하더라도 부모님의 내 결정을 인정해주고 응원을 해 주셨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것을 선택하기에 나는 너무나 어렸고 나약했다. 결국 꿈 대신 현실을 선택했다.
졸업을 하고 25년이 지난 지금 다시 글을 쓰고 책을 내려고 하는 것은 오로지 내 꿈을 이루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전자공학과 국문과를 선택해야 했던 이분법적인 것이 아닌 내 삶을 글로 옮기고 싶었다. 회사생활을 하는 직장인이 글을 쓰는 방법, 책을 출간하는 방법을 통해 누구나 자신이 가진 꿈과 능력을 글로 표현하는 기회를 찾기 위해서다. 25년 전 잔디밭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토론하는 그들로 돌아가 이제는 내가 직장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글을 쓰고자 한다. 직장인과 작가의 길은 힘든 고갯길을 넘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고개 정상에서 바라보는 새로운 세상을 기대한다.
복학생이 된 첫 해, 화학과 물리 성적은 ‘F’를 받았다. 뜨거운 여름 방학 내내 계절학기를 들어야 했다. 대학교 방학이 길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적어도 그 해 여름 방학은 그랬다. 반면, 철학과 문학사는 ‘A’를 받았다. 지금 내가 직장인으로서 책을 써야 하는 이유를 그때 알았어야 했다. 그래도 늦지 않았다. 여전히 난 직장인이며, 물리와 화학보다 글쓰기를 통해 책을 내고자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