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그게 바로다

두렙돈 세계여행 중 107일차 태국 국경에서 아침 묵상 #99

by 스피커 안작가

2019년 2월 12일 화요일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찌니라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출애굽기‬ ‭4:10-17, 19-21‬ ‭KRV‬‬

내가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뭔가? 우리는 자신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방법은 정반대이다.



다윗은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했다. 다윗이가장 잘했던 것은 전쟁이었다. 그랬던 다윗이 전쟁에서 손을 떼고 왕궁에서 휴식을 취할 때 그는 바세바를 보고 죄를 범하였다. 왜 전쟁에 참여를 하지 않게 되었을까? 자신의 군사들은 전쟁을 하면 무조건 이긴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일까? 당연하다는 생각에 왕궁에서 맘 편히 지내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다윗.



자신이 잘하는 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다윗은 전쟁에 참여를 하지 않는 순간 하나님께 쓰임을 받지 못했다. 자신이 잘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 위해 준비된 삶이 다윗에게 이때 만큼은 없었다.



아브라함에기 본토 아비집을 떠나라고 한 이유,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며 고생을 했던 이유, 남의 꿈은 듣기도 전에 해석을 할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의 꿈을 해석하지 못한 다니엘. 이 모든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너가 했다고 착각하지 마! 내가 널 도운거야!”라고 말씀 하신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찾아오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출애굽 할 것을 명령하신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모세를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모세처럼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정작 선택을 해주시면 “주님, 저는 이걸 하고 싶은데요?”, “지금은 제가 하고 싶지가 않아요. 준비가 덜 되었거든요!”라고 말을 하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도구가 아닌 내가 쓰임 받고 싶은 그것을 우리는 주님께 구하고 있다.



모세도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었겠지만 모세가 원했던 것은 지도자가 아니었거나 자신이 혈기왕성했던 40대에 리더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이것이 확실한 것은 우리는 하기 싫은 것을 만났을 때 변명을 한다.



핑계를 되면서 그 일을 피해려고 하는 것이다. 모세가 생각했을 때 리더의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가 말하는 것이었다. ‘말 못한다고 하면 다른 걸 시키겠지?’ 모세는 이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하나님은 모세에게 화를 내신다. “아론이 있잖아!” 우리는 우리가 잘하는 것으로 멋있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다. 연말 시상식에서 상을 받은 배우나 가수처럼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를 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싶어 한다. 진짜로 그분의 영광일까? 나의 영광일까? 멋있게 그분을 찬양하고 싶다는 표면만 있을뿐 그저 빈껍데기일 뿐이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기도를 잘 돌아봐야한다. ‘~해주시면 주님을 위해 살겠나이다’, ‘주님 저는 이걸 하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돈 많이 벌면 주님을 위해 쓰겠나이다’ 마음이 잘 못된 것이지 100원으로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으며 우리 하나님은 그 100원으로도 영광 받을 수 있는 분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론을 보내주신 이유를 잘 생각해보자. 왜 아론을 보내주셨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협력해서 선을 이루라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두려움은 언제 생길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을 때와 내가 모든 것을 다 해야된다는 부담감이 생길 때이다. 후자를 살펴본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 혼자 잘 났다고 생각하지 마! 주변 사람들과 손을 잡고 함께 나의 일을 해줄래!” 말씀하신다.



당신은 무엇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가? 그걸 가장 먼저 내려놓는 것이 믿음이고 주님께 쓰임받는 길이다. 결국 다시 그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수도 있지만 그건 전적으로 그분의 선택이지 내가 선택해야 할 사항이 아니다. 아론처럼 선택되어 자신의 달란트를 온전히 사용되어져야 한다.



한국교회에 ‘내가 했어’가 사라질 때 그 일을 하신 하나님이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며 선교적이 삶이다. 지팡이를 구하지 말자. 지팡이는 도구일뿐 능력은 하나님께 있다.



바로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또한 강팍해져 있음을 기억하자. 자신의 바로를 깨는 것이 진정으로 출애굽을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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