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마음을, 사진으로 배를 까는 '함께'의 재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을 비웃거나 비난하거나, 관심조차 갖지 않습니다.
모든 시작에 있어서 손가락질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내가 어디론가 묵묵히 달려가거나 꾸준히 한다면, 결과가 어찌됐건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의 손가락 역시 하나 둘 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다 펴진 손으로 박수를 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결국 무엇이든 해내는 사람>, 김상현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건 나의 작은 일부를 알 뿐 안다는 착각에 불과했다.
연휴 동안 비가 오니 아이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많았다.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더라라는 말을 하자 아이들은 자신의 MBTI를 앞다투어 이야기했다. 올해 열 살이 된 넷째도 자신의 MBTI를 알고 싶다며 MBTI 검사를 받고 MBTI 행렬에 동참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어릴 적 혈액형과 별자리 유형, 성품 성격 기질 유형 등을 살피며 나를 탐색한 모습이 생각났다. 내 마음에 드는 표현은 나라고 가슴을 쫙 펴며 “봐봐 이게 나란 사람이야!” 이야기하지만,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은 입을 꾹 닫고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대며 “이건 내가 아닌 것 같다"라며 거리를 두었다. 재미 삼아 해보았지만, 나인 것 같은 부분이 마음과 생각에 담겼다. 특히, 나라고 착각하여 그렇게 살아왔었던 것이 있는데 “나는 독립적인 사람으로 혼자 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다.
이러한 착각은 나를 외로움에 가두었지 싶다. “나는 독립적인 사람으로 혼자 하는 걸 좋아해”라고 되뇌었다. 점차 나에게 다가오는 이들을 맞아주지 못했고,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다가서지도 못했다. 그저 상대방의 기대와 적당한 착각을 묵인하며 준비된 나만을 슬쩍 보여주는 정도였다. 안전거리를 두고 나의 멋에 취해 정작 나를 모른 채 지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기가 겁이 났던 것 같다.
넷째를 낳고서야 나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혼자서도 잘해요. 혼자가 편한 줄 알았지만, 함께하니 더 잘 되고, 함께하는 즐거움을 맛봤다. 다만, 이때까지는 신앙공동체에 한해서 안전성을 느꼈고, 신앙에 국한되어 나를 드러냈다. 다섯째를 낳고서는 일면식도 없는 데에 더해 신앙과는 무색한 그룹에서 나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17년째 육아라는 공통점으로 온라인상에서 교제를 이어오는 그룹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그룹은 나의 이야기를 하는 공간이다. 한 문장이 제시되면 필사와 단상을 이어가는 <한문장으로 도움닫기> 모임이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과 반응이 신경 쓰였다. 그룹대화방에 인증되는 멤버들의 글을 보며 문장력과 위트에 감탄하기 바빴다. 나의 단상 쓰기를 주저하는 순간이 많았다. ‘비웃거나, 비난하거나 손가락질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가 가득했지만 기우였다. 뼛속까지 비경쟁을 모토로 모인 분들이었다. 손가락으로 카카오톡 공감 스티커를 눌러주는 게 아닌가? 하트, 엄지 척, 놀람, 웃음, 울음의 공감 스티커로 손가락 사용의 좋은 경험을 누적했다.
주저하던 손가락이 하나둘 펴지기 시작하자, 또 다른 안전한 만남에 연결되었다.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운동이라고 모르고 살던 내가 오운완을 말할 수 있게 응원받고 있다. 그야말로 한 그룹에선 글로 마음을 까고, 한 그룹에선 사진으로 배를 까는데 함께 까는 재미가 쏠쏠하다.
잠시 일상에 멈추었다가도 꾸준함의 대열에 머물게 해준다. 함께 가자고 손 내미는 사람들, 그럴 수 있다고, 나도 그렇다며, 괜찮다고 토닥여주는 손 때문이다. 함께라서 하고 있는데 내가 한 냥 잘한다고 손을 펴서 손뼉까지 치는 사람들이다. 이들로 평가에 익숙한 나쁜 경험들이 씻어진다.
이제는 안다. 나는 독립적인 것을 동경할 뿐, 함께해야 힘을 받고, 함께함을 통해 나의 자연스러움이 드러나는 사람인 것을… 거기다 더해 아직은 격려를 통해 추진의 동기를 받는 자임을… 카톡 공감 스티커에 박수 스티커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모든 글에 손뼉을 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