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혼밥’에 익숙하다. 아니 좋아한다. 혼밥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전부터 혼자 밥 먹으러 다니곤 했다. 20대 때부터 퇴근하고 어학학원을 가기 전이나 후에는 혼밥을 했다. 새로 생긴 식당이 궁금한데 서로 바빠서 시간 맞추기 힘들 때는 혼자서라도 먹고 와야 했다.
‘아웃백’이라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도 혼밥을 했다. 그때는 혼밥 ‘쪼렙’이라 혼자서 밥을 먹게 될수록 제대로 된 곳에서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분이세요?”
“한 명이요.”
“네?”
안내 직원은 필요 이상으로 놀라며 나를 테이블 서버에게 넘겼다. 다시 한번 똑같은 질문이 오갔다.
“몇 분이세요?”
“혼자예요.”
인계받은 직원은 내가 민망할 정도로 당황해하더니 최대한 조용한 자리로 모시겠다고 했다. 뭐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내가 앉은 곳의 옆 테이블에서는 생일 파티를 성대하게 하더라는. 무슨 상관이랴. 나는 ‘투움바 파스타’에 맥주를 곁들여 책과 함께 유유히 나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게 벌써 16년 전쯤.
딸아이를 임신했을 때의 일이다. 집에 먹을만한 게 하나도 없어서 고민했다. 또 라면을 끓여 먹어야 하나 어쩌나 고민하고 있을 때 집 앞 고깃집의 점심 메뉴가 생각났다. 무거운 배를 이끌고 가서 된장찌개를 시켜 먹으며 공깃밥 두 개를 해치웠다. 그때부터 나는 공깃밥 두 개를 거뜬히 해치우는 여성이 되었다.
나는 혼밥뿐만 아니라 혼커피, 혼영화, 혼공연도 즐겼다. 친구와 카페에서 수다 떠는 시간도 소중하지만 혼자 조용히 커피 마시며 책을 읽는 시간은 나에게 편안한 휴식을 준다. 좋아하는 카페에 책을 들고 가서 읽기도 하고 작업을 하기도 한다. 집에서는 TV가 “나 왜 안 봐? 넌 나 안 보고 싶어? 어제 제대로 못 봤잖아. 넷플릭스에 떴을걸. 난 네가 날 보는 멍한 얼굴이 너무 보고 싶어.”라며 유혹해댄다. 침대는 “나에게로 와서 누워. 나 엄청 포근해. 인생 뭐 있어?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는 거지. 어서 이리로 와.”라며 끊임없이 수면 향기를 뿜어댄다. 죽어라 안 되던 일이 카페에서는 술술 풀린다.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다. 커피 한 잔을 여유 있게 마실 정도면 충분하다. 물론 음료 한 잔이 더 필요할 때도 있지만 거기서 읽던 책의 끝을 보고 책장을 덮는 날은 왠지 더 뿌듯하다. 혼 커피는 사랑이지.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마이너적인 영화를 찍었을 때는 억지로 같이 가자고 권하지 않는다. 장르에 대한 호불호가 명확히 나뉠 것이고 영화에 대한 평은 곧 내 배우에 대한 평일 것 같아서 불호의 의견을 들으면 마음이 불편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 영화는 대부분 관객이 없다. 평일 오전 영화관에 3~5명인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는 큰 화면을 나 혼자 독차지하는 기분이 꽤 괜찮았다. 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내 배우를 독차지하는 호사스러운 기분. 혼영화의 묘미다. 물론 영화나 내 배우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픈 실재 덕메(덕질 메이트)가 절실할 때도 있다. 널리 널리 알리고 싶지만 또 나만 알고 싶은 이 양가적인 마음. 혼영화에서는 느낄 수 있다.
학교 다닐 때부터 성악가 조수미의 CD를 달고 살았다. 그런 조수미 님이 내가 살던 곳에 공연을 온다고 했다. 그녀는 거의 해외에서만 있었기 때문에 이번 기회를 놓치면 나는 영영 못 볼 것 같았다. 남편은 시큰둥했다. 순간 빠른 계산이 지나갔다. 일단 공연은 비싸다, 남편은 그 시간을 못 견딜 것 같다, 어차피 공연은 혼자 보는 것이다, 그럼 굳이 비싼 돈을 내고 싫다는 사람을 견디게 할 필요가 있나? 그럴 필요는 없다, 공연은 나 혼자 보는 걸로 결정했다. 귀로 듣기만 하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가슴 뛰는 공연이었다. 오롯이 혼자 그녀의 미세한 숨소리, 눈빛, 몸짓에도 집중할 수 있었다.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될 수 있는 것에는 역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실력은 물론이고 무대와 관객을 대하는 태도와 배려에 이미 팬이었지만 한 번 더 팬이 된 날이었다.
지금은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집에서 혼밥이다. 냉장고를 열거나 식량창고를 뒤져 적당한 먹을 만한 것을 찾는다든지 배달시킨다. 혼자 식탁에 주섬주섬 늘어놓고 TV를 켠다. BGM으로 적당한 프로그램을 찾아 틀어놓고 먹기 시작한다. 그렇게 여유로운 혼밥의 시간을 즐기던 내게 밥 친구가 생겼다.
혼자서 동동거리며 살림하고 애들 키우는 가정주부에게 고양이 도우미가 찾아온다는 동화책을 예전에 읽었다. 딸아이의 책이었지만 이 책을 읽고 정작 깊은 공감과 위로를 받은 사람은 딸이 아니라 나였다. 가장 좋아하는 동화책이 뭐냐는 질문에 별 고민 없이 <<고양이 도우미>>를 꼽을 정도다. 동화 속의 엄마는 하루 종일 바쁘다. 애들 챙기랴,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한다고 정신이 없다. 그런 엄마에게 고양이 도우미가 찾아온다. 도와주겠다며 찾아왔지만 정작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다. 오히려 점점 요구 사항만 늘어날 뿐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혼자 대충 먹던 점심을 고양이와 함께하게 되면서 외로움을 덜게 되고 둘은 더욱 끈끈해진다는 이야기였다. 엄마는 혼자 육아와 살림을 하며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가족들은 그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지만 고양이는 알아주었다. 말이라도 예쁘게 따뜻하게 건네주었다. 아무것도 못하는 고양이는 그저 집안일을 하는 엄마 옆에서 해낙낙하게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제 할 일을 다 한 것이다.
이때부터였을까. 막연하게 언젠가 반려동물을 키우게 된다면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생각한 게. 그 막연했던 언젠가가 찾아왔다. 그리고 지금 집에서 혼밥을 할 때 훌륭한 밥친구로 있어준다. 내 밥을 챙기기 위해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면 파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갈색 귀를 쫑긋 세운 채 나를 향해 갈구한다. “나도 밥 먹고 싶어냥.” 딸아이가 아기였을 때 만들던 이유식보다 더 정성을 다해 이것저것 섞어 최고로 맛있는 밥을 만들어 준다(물론 만족할지는 모르겠다). 내가 밥을 먹을 때 이 친구도 함께 밥을 먹는다. 딱히 대화를 주고받는 것은 아니지만 묘한 동지애를 느낀다. 나는 식탁에서 이 친구는 자신의 식사 자리에서 각자 혼밥을 하지만 완전한 혼밥은 아니다. 한 공간 안에서 각자의 자유를 즐기며 서로에게 신경을 쓰는 듯 쓰지 않는 식사 시간이다. 밥을 같이 먹는 사이는 각별하다. 우리는 소중한 시간을 공유하며 적당한 외로움과 적당한 자유로움을 공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