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선명한 처음

두 사람의 죽음

by 나디아

1. 그의 죽음


내 기억 속의 그는 꽤 낭만 있는 사람이었는데, 특히 긴 곰방대를 태우는 모습이 그러했다. 왜인지 어린 나의 눈에 그 모습이 좋아 보여서 괜히 그의 옆에 슬쩍 다가가 말을 걸곤 했다. 긴 그의 다리는 땅에 닿아있고, 내 짧은 다리는 달랑거리며 함께 마루에 걸어 앉아 있는 시간이 좋았다.


그는 술을 좋아하다 못해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술에 영혼을 빼앗긴 상태였다. 으레 '알코올중독자'라면 불행의 그림자 아래에서 생겨나는 것이라 여겨왔기에,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는 늘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매일 같이 술에 취해있는 모습을 보며 자란 그의 식구들은 술이라면 진절머리가 난다고 했고, 그런 그의 식구들을 대신하여 술상에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눠주는 유일한 사람은 아빠였다. 일 년에 두 번, 셋째의 사위와 술잔을 함께 기울일 수 있는 명절은, 그는 기다렸을 것이다.


그는 해가 거듭될수록 야위어 갔다. 마지막은 집에서 편히 있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의 말에 따라 집으로 온 그는 곧 하늘로 긴 여행을 떠났다. 장례 절차를 바라보는 어른들은 마지막을 예상했던 것처럼 담담했지만, 고작 10살 남짓이었는 나는 그가 왜 나무상자에 들어가야 하냐며 울었고, 그가 그려주는 동물 그림을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는 거냐며 울었다.


빼빼 마른 굳은 몸으로 병풍 뒤에 누워 있던 그의 모습, 죽은 이의 평화를 비는 신부님의 기도와 집 안을 가득 채웠던 사람들의 곡소리가 아직도 선명하다.


2. 그녀의 죽음


'맏며느리의 둘째가 또 계집애라니!"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온 내가 틀림없이 사내아이일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곧 낙담한 그녀는 나를 미워했다. 방바닥에 엎드려 있는 고추 달린 사촌 동생을 폴짝 뛰어 넘었다는 이유로 '어디 계집년이 건방지게 남자를 타 넘느냐!'는 말을 들어야 했을 정도다.


머리가 굵어진 나는, 그녀가 내게 내뱉는 모든 말과 행동을 곱씹으며 원망을 키워 나갔다. 집 안의 대소사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고생한다는 격려는커녕 이유 없이 모진 단어만을 쏟아내는 그녀를 보며 분노하기도 했다. 당신도 여자이면서 왜 같은 여자에게만 이토록 엄격한지 이해할 수 없는 날들이 쌓여만 갔다.


서로의 안부도 묻지 않으며 수년이 흘렀고, 성인이 된 내가 그녀를 다시 만난 건 어느 여름날 구미의 한 장례식장이었다. 온화한 표정의 영정사진 속 그녀가 몹시 낯설게 느껴졌다. 임산부였던 언니만 제외한 모두가 그녀를 염하는 과정에 참관하였다. 장례지도사가 염포로 그녀의 시신을 꽁꽁 묶을 땐, 마치 내 숨이 막히는 듯해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기도 했다.


입관을 앞두고 마지막 말을 전하는 시간이 되자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고생했다며, 평히 잘 가시라며, 그녀에게 인사하고 돌아서는 아빠의 모습, 그렁그렁한 눈동자로 끝내 눈물을 참아내는 아빠의 가슴 먹먹함이 나를 슬프게 했다. 내가 아빠를 사랑하듯, 아빠도 그녀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녀를 보내고 나서야, 차별이 아닌 동등한 사랑을 받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제는 안다. 사랑했건 미워했건 영영 이별한다는 것 그 자체가 그리움이 된다는 걸. 미움이라는 감정도 결국 사랑 안에 있다는 걸. '죽음'으로 비롯된 모든 헤어짐의 슬픔은 언제나 '선명한 처음'일 수밖에 없다는 걸.

작가의 이전글우연을 사랑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