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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도모 Jul 08. 2021

기업의 비전을 찾고 있던 나에게

대기업에 다니면서 스타트업처럼 일하라고 하는 걸 어불성설이라고 합니다.

대기업의 장점이 무엇일까?


8년 전 홍보대행사에서 대기업으로 이직하면서 남들도 다 하는 그런 고민, 그러니까 "왜 나는 이직해야 하는가?" 가와 같은 알렝 드 보통 스러운 고민을 했던 적이 있었다. 이직해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쳤지만, 그것이 왜 대기업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해볼 때 사실 정확한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당시에 나에게 대기업은 '가지 않은 길' 이었으니까.


가보지도 않은 대기업을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수는 없었지만, 대기업을 다니는 친구들을 통해서 듣기로는 대기업의 장점이 몇 가지가 있었다.   

     사람을 부품으로 여긴다.

     시스템 속에서 여기저기 이동할 수 있다. (강제로 이동되어 진다.)

     사회적으로 대기업이다.


특히 대기업이 가진 시스템이나 분위기를 경험해보고 싶었던 욕심이 컸고, 대행사에서 대기업으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반은 성취한 듯 하다. 적어도 대기업이 가진 인프라나 시스템, 그리고 위상으로 인해서 일을 해나가는 방법들에 대해서는 분명히 배웠다. 그리고 이해도 하게 되었다. 사람이 많은 조직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도 분명 있지만, 많은 것들이 갖추어지고 자본력이 있는 회사에서 중요도가 무엇인지, 무엇을 '지우면서' 일을 해야 하는지를 지난 8년간 배운 것 같다.


대기업에서 일을 하면서 처음에는 그냥 열심히 했다. 다양한 미션들이 폭포수 내리듯이 쏟아져내렸고, 그걸 하나씩 해나가다보면 어느 순간 내가 생각지도 못한 자리에 있진 않을까 하는 환상이었다. 현실은 냉혹했다. 내가 다니는 직장이 보장해주는 것은 월급이었다. 달콤하긴 했지만 인생을 담보로 하기에는 크지 않은 매월 들어오는 달달한 꿀이었다. 그리고 시킨 일 이상을 한다고 해도 그 이상을 받지 못할거라는 패배감도 매주 주급처럼 들어왔다. 주말은 행복한 일이 되었고, 출근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되었다. 대기업에 있으면서 다가와야 할 다양한 기회와 성공들은 사실 대기업이라고 주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했다. 그렇다. 그리 대단한 것을 이룬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회사에서 바라는 인재상에 맞추려면 어떤 사람이 되야 할까?


적어도 위에서 언급한 '부품' 이상의 것이 되어야 했다. 일에 대한 능률을 스스로 성취해야 했으며 그걸 위해서는 열정이라는 단어 이외에 어마한 것이 필요한 듯이 여겨졌다. 약간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 없었기에, 큰 노력을 기울이는 수고로움을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미션은 끊임없이 쏟아져내렸고, 그 미션들은 통합되거나 정리되지 않았다. 흘러오는 물살을 가르다보면 그 끝에 목적지가 있겠다는 환상이 깨져나갈 때쯤, 바로 앞에 월급날, 바로 앞에 주말에 기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쩌면 대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어쩌면 과거에도 이런 인재상이 대기업에 필요했을 수 있다. 명칭만 바뀌었을 뿐, 필요한 인재는 같은 사람이겠지. 부품들을 엮어내거나, 원래 하고 있는 업무 이상을 해내면서 계속해서 동기 부여를 함으로써 이동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재. 그런 사람들이 위로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 소수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대기업이라는 망망대해 위에서 자기 자리 하나 지키고 주말이 되면 또 안도를 하는 그런 상황에 놓여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건만 열정을 발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패배감과 좌절감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흔히 하듯이 나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 "일이 너무 재미없어." 라는 말로.


하지만 이 와중에도 누군가는 열심히 하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건 적어도 그들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회사가 원하는 바와 본인이 원하는 바가 잘 맞아 떨어진 것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들은 행동을 하고 회사에서 인정을 받고 크진 않지만 작은 스팟 보너스와 위로 올라가는 성공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연차로 증명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반대로 그런 성공을 바라보지 않은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가 더 목말랐다. 열정을 내기보다는 휴가를 내는 편이 더 편했다. 그게 어쩌면 지금의 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씩 다 해볼 필요"가-'필요라고 쓰고 여유라고 읽겠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는 없었다. 하는 일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고, 특정 기간을 벗어나면 kpi 에서도 조금은 자유로웠다. 정해져있는 시스템 속에서 해내는 업무들로 벅찼고, 퇴근하기 10분 전부터 회사에서는 마음을 놓았다. 주말에 일 생각을 하지 않으니 내가 더 발전해야 할 방향을 고민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일 하는 시간 내에 내 일에 대한 고민을 할 시간이 없고, 퇴근을 하면 역시 일에 대한 고민을 놓으니, 나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발전의 시간은 차츰 줄었다.

아쉬움이 큰 사람들은 이직을 했고, 조금 더 쉬움을 찾는 사람들은 머물렀다. 그리고 머무른 사람들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약간의 패배감이라는 사탕을 먹고 조금은 달콤한 저녁과 주말과 월말과 휴가를 누렸다. 아니 다른 사람들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정확히는 내가 그렇다.


대기업이 하는 다양한 일들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냉정하게 말하면 소수의 인원이다. 혹은 내가 스스로 하는 일에 대한 성과가 눈에 보이는 경우 역시 더욱 그렇다. 그런 사람은 몇이 없다.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드물고 대부분은 그게 기회인지도 모른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수백가지 일 중 하나였고, 잘된 것은 있지만 그 원인을 뚜렷하게 분석하거나 방향을 제시해주는 경우는 없었으니까. 결국은 시스템 속에서 다양한 업무를 배우다가, 시스템을 벗어나야만 자신이 원하는 걸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환상을 하게 된다. 매트릭스 세계처럼 벗어나지 못하면 나를 찾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루를 버티기에도 많은 미션들이 있고, 내가 관심을 갖거나 좋아하는 일을 하기엔 여유가 없다. 일에 대한 성찰과 방향을 스스로 세우기에는 다양한 사람과 일이 모여 있는 와중에 중심을 잡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회사 내에서 자신의 비전을 세우는 일이 중요한 것은 비전이야 말로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다.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처럼 일하라는 것은 참 어려운 말이다.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비전과 회사를 동일시 하면서, 함께 키워보려는 생각이 통할리가 없다. 너무 많은 비전과 너무 많은 개인사들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대신 반대로 생각해서라도 답을 찾아봐야 한다.


비전을 세우지 않고 일을 해야만 대기업 시스템 내에서 일을 더 효율적으로, 잘 한다는 평가를 듣기 쉽다. 내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다녀본 사람은 알거다. 그러니까, 찾지 못할 비전을 찾기보다는 물살에 버티는 연습을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대기업이라는 곳이 나를 지켜주고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대기업이라는 거대한 물살과 흐름 속에서 내 비전이 깨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 회사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비전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이 회사를 다니면서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걸 찾는 방법의 차이다일 뿐이다. 지우는 과정을 정말 고통스러울지라도, 이 망망대해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자신이 관심있던 다양한 것들 안에서 추리는 작업을 해야만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정답이 아닐지도 모른다. 회사에서 찾는 비전으로 성공으로 이어지는 사람들이 보면 코웃음을 칠지도 모른다. 그치만 내가 부품이지 않을까를 자각하고 있는 회사원이라면, 적어도 이 시점에 나를 찾는 노력을 해야 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적어봤다. 나라고 하는 비전이 있을거라는 믿음. 그게 깨져나가는 걸 막아야 한다. 그렇다. 이건 내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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