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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동나동 Sep 07. 2019

수학자들은 덕후인가 (1편)

수학이 취미가 될 수 있을까?


한 때 수학이 취미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보통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불면증이 심할 때 숙면을 취하려고 수학 문제를 푼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20대 후반 수학은 잠 못 이루는 나에게 가장 확실한 수면제였다. 아무런 이해관계 없는 순수한 몰입. 물론 그것은 한 때였지만.


일상생활에서 수학적인 언어를 쓰는 사람은 어떤가? 중학교 때 그런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나에게 맨홀 뚜껑이 왜 동그란지 아냐고 물었던. (지금 혼자서 왜 동그란지 생각중이라면 당신도 가능성이 있다.) 애석하게도 일상에서 수학적인 언어를 많이 쓰면 친구가 많지 않다.  맨홀 뚜껑을 언급하던 그 친구도 그랬다. 결국 나중에 외로웠는지 종교에 심취하더라만.


오덕이란 말은 일본어 오타쿠에서 왔다. 매니아보다 조금 더 심하게 어떤 특정 분야에 매달리는 사람을 오타쿠라고 부르는데 비디오게임 오타구, 애니메이션 오타구 하는 식이다. 70~80년대 일본에서 등장한 오타쿠란 단어는 한국에 넘어오면서 오덕, 오덕후, 덕후 등등으로 변용되었다. 오덕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지만 단연 압도적인 이미지는 “집착” 내지는 “몰입”이다. 그래서 오덕이란 말은 어떤 이에겐 칭찬처럼 들리기도 하고 어떤 이에겐 욕처럼 들리기도 한다.


집착이나 몰입이란 면에서는 수학도 둘째가라면 서러운데 수학 오덕이란 말은 쓰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오덕이란 말은 직업이나 전공에 붙이지는 않으니까. 오덕이란 말에는 대가 없이 몰입한다는 이미지가 있다. 수학을 대가 없이 몰입한다니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긴 한데 역사 속 수학자들은 사실 대부분 수학 오덕이었던 경우가 많다. 직업으로 수학자를 선택한 사람도 많지 않다. 순수학문이란 말이 대체로는 의미가 없지만 여전히 그 말에 그나마 가장 어울리는 분야가 수학인건 분명하다.


수학자의 보편적 이미지


이를테면 수학을 잘 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이런 것이다. 집중력이 뛰어나고 논리적이지만 소통에 서투르다. 사회성이 떨어지고 감정표현이 원활하지 않으며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화성에서 온 수학자, 금성에서 온 XXX>와 같은 표현으로 바꾼다면 XXX 자리에는 무엇이 올 수 있을까?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겠지만 의외로 생각처럼 대립지점이 명쾌하지는 않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단순한데 어떤 직업군에도 수학적 마인드는 필요할 수 있다는 얘기다.


수학자하면 사람들은 흔히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거나 밤새 연습장에 끄적거리며 문제를 푸는 집요한 장면만을 상상하지만 의외로 직관적 상상력에 기댄 수학자들도 많다. 가우스는 커다란 나무 밑에 앉아 공상을 하다가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이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빈도가 낮다는 사실로부터 소수의 빈도를 고민했다. 이 고민을 이어 받은 제자 리만은 제타함수란 개념을 도입하는데 리만가설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난제로 유명하다. 리만가설은 1900년 수학자 대회에서 힐베르트가 제시해서 유명해진 23개 난제 중에 포함되었고 여전히 미해결과제로 남아 있다.


리만이 쓴 논문은 고작 10페이지에 불과하다. 리만은 논문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남겼다. “...모든 근이 이러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물론 이는 엄밀한 증명을 거쳐야 한다. 다만 본 논문의 주제에는 벗어나므로 헛되이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막고자 이쯤에서 다음으로 넘기기로 한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리만이 아껴야 했던 그 몇 시간 때문에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남아 있으니 말이다.


확실히 수학자들은 최적화된 기호로 표현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서인지 미니멀리즘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오일러는 아예 증명을 생략하고 결론으로 건너뛴 다음 몇 년 후에 증명을 완성하는 경우도 있었다. 편집증적으로 매단계마다 논리적 정합성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렇게나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냅두다가 문득 큰 물고기를 길어 올리듯 아이디어를 낚아채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감성이 고도로 절제되어 있거나 세상과 동떨어진 은둔자적 이미지와 상반되는 수학자도 많다. 프랑스 천재 수학자 갈루아는 프랑스 혁명 당시 급진 공화주의자였는데 오늘날로 치면 열혈 운동권 학생이었다. 퇴학, 체포, 수감 등이 일상적으로 반복되다가 21살에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결투를 신청해 총에 맞아 숨진다.


한 편으로 수학자에게 씌워진 순수한 지식인 이미지는 어떤가? 대한수학회 회장이었던 최윤식은 사사오입 개헌 당시 이승만 정부의 해괴한 주장을 앞장 서 주장한 사람이다. 그가 반올림 의미조차 제대로 몰랐을 리는 없다.

흔히들 수학하면 끝없는 자기와의 싸움 속에서 대뇌피질을 발달시키는 고된 과정을 떠올린다. 대충은 맞는 이야기다. 토론을 통해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 의견교환 과정에서 논리가 다듬어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수학이라는 언어는 소통을 중심에 놓지 않는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수학자들이 뭔가를 알아가는 과정에는 대체로 등장인물이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 수학자 자신만 등장하는 모노드라마인 경우도 많다.


(2편에서 계속)


2편 바로가기 : https://brunch.co.kr/@nadongpeace/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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