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동나동 Sep 08. 2019

수학자들은 덕후인가 (2편)

수학자들은 덕후인가(1편)에 이어

https://brunch.co.kr/@nadongpeace/10


어이없는 죽음, 아르키메데스


아르키메데스는 그리스 시대 최고의 수학자로 평가받는다. 조금 유치하긴 하지만 인류 역사에 있어 가장 위대한 수학자를 5명만 뽑아라 그러면 아르키메데스는 꼭 들어갈 것 같다. 그 정도로 알아낸 게 많다. 원의 넓이, 원주율     의 근삿값, 구의 부피, 구의 겉넓이, 원기둥과 원뿔의 부피비 등등 뭐 아무튼 엄청나게 많이 알아냈다. 금관이 순금으로만 이루어졌는지 불순물이 섞였는지 알아내라는 왕의 명령에 고심하던 차에, 욕조에 몸을 담궜다가 밀도 개념을 알아내고 유레카 외쳤다는 그 사람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아르키메데스에 얽힌 일화는 많다. 포물선에서 빛의 진행경로를 기하학적으로 이해한 아르키메데스는 아주 커다란 포물면 거울로 햇빛을 모아 배를 태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가하면 지렛대의 원리를 이해한 후에 “나에게 아주 큰 지렛대만 주면 지구를 들어올려 보이겠다.”고 폼을 잡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사실인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다. 대부분 명확한 문헌정보로 남아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후대에 언급된 이야기들은 미화됐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생각해보자. 포물면 거울로 빛을 모아 배를 태우려면 거울이 엄청 커야 하는데 기술적으로 그게 가능했는지 의문이다. 더 이해가 안가는 건 어릴 적에 돋보기로 개미 태워본(아이고 끔찍해) 사람은 알텐데 점화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상당하다. 상대편 병사들이 삼겹살도 아니고 자기 몸이 뜨거워지고 있는데 불이 붙을 때까지 가만있었단 말인가?


아무튼 일단 그런 점을 감안하고 얘기하자면 아르키메데스는 죽음 또한 수학자답다. 아르키메데스는 이탈리아 옆에 있는 시칠리아 섬에 살았다. 아리키메데스가 살던 당시에 시칠리아 섬은 시라쿠사라는 도시국가였다. 때는 바야흐로 그리스 시대가 저물고 지중해 패권이 로마로 넘어가던 시대였다. 그런데 시라쿠사는 사방이 절벽에 가까운 섬이어서 끝까지 완고하게 버텼다.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신무기 덕을 봤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결국에는 시라쿠사도 로마에 굴복했다. 오늘날에도 그렇겠지만 전쟁이라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뇌들을 쉽게 죽이고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지중해 일대에서 가장 뛰어난 수학자였다. 로마군이 밀려올 때 아르키메데스는 바닥에 원을 그리고 뭔가 골똘히 생각 중이었다. 당시는 종이가 흔하지 않던 시대였으니까. 아르키메데스는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로마병사가 그 원을 밟아서 그림이 뭉개졌고 화가 난 아르키메데스는 “내 원을 밟지마.”라고 소리지르며 로마병사를 밀쳐냈단다. 화가 난 로마병사 손에 아르키메데스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야말로 개죽음이다. 


수학계의 베토벤, 오일러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도 대부분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안다. 모차르트는 천재 이미지라면 베토벤은 처절한 노력가 이미지다. 물론 천재니 노력가니 하는 것도 상대적 이미지일 뿐 다들 남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베토벤이 귀가 먼 상태에서 음악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잘 알텐데 악성(음악의 성인)이란 별명은 그 엄청난 집중력에 걸맞는 찬사다. 


수학에도 모차르트와 베토벤 같은 사람들이 있다. 모차르트에 비유하기엔 가우스가 제격이다. 가우스는 자다가 일어나면 공식을 하나 만들어냈을 정도로 수학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런데 알고 보면 천재 가우스도 엄청난 노력가였다. 노력이란 말이 너무 많이 오염되고 있으니 달리 설명하자면 엄청난 수학 오덕이었다. 어딜 가나 수학 생각만 했으니 말이다. 학창시절 쉬는 시간에도 친구들하고 안 놀고 매일 약수, 배수 계산하고 있었고 말년에는 괴팅겐 대학 천문대학장을 지내면서 거의 천문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학계 베토벤은 누구인가? 오일러가 가장 적합하다. 오일러 역시 엄청나게 많은 논문과 공식을 발표한 것으로 유명한데 놀랍게도 이 사람은 말년에 시력을 잃었다. 원래부터 엄청난 집중력을 자랑하던 오일러는 밤새 수학 문제를 푸는 일이 많았다. 당시는 조명도 지금처럼 발달한 시대가 아니고 의견교환도 서신으로 하던 때다. 결국 과도하게 눈을 혹사시킨 오일러는 녹내장으로 한 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그런데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문제풀이를 즐겼고 결국에는 남은 한 쪽 눈마저 시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런데도 시력을 잃은 후 그가 발표한 논문 양이 엄청나다. 심지어 나머지 한 쪽 눈마저 시력을 잃게 되자 “좌우가 균형이 맞지 않아 불편했는데 이제야 안정감이 드는구만.”이라고 했다니.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낙관주의만큼은 정말 흉내 내고 싶지 않을 지경이다. 


(3편으로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수학자들은 덕후인가 (1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