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특강으로 분주한 학원. 교무실에 무심코 놓여 있는 국어 모의고사 시험지 첫 페이지, 시의 한 구절같은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겨우살이? 하루살이 같은 건가? 겨울을 나는 식물을 일컫는 말인가? 아무튼 라임이 좋다. 100% 이해는 가지 않지만 그럭저럭 의미도 이해하겠다. 하찮은 노력이란 없다는 거겠지. 입시를 앞둔 수험생에게 건네는 말만 아니라면 꽤나 근사한 문장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입시다. 그 어떤 근사한 말도 그냥 '공부나 열심히 해라.' 그렇게 들린다. 그래도 문장 자체는 근사하니까. 나중에 겨우살이의 실체를 알아볼 생각으로 까먹지 않기 위해 문장을 적어둔다.
수능 모의고사 답안지에는 필적확인란이란 게 있다. 부정행위가 벌어졌을 때 본인여부를 확인할 목적으로 자필 문장을 적게 하는데, 적어야 할 문장은 시험지 첫 페이지에 적혀 있다.
맑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9월 3학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 조지훈, <마음의 태양>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꽃밭이다 (9월 1,2학년, 인천광역시교육청)
- 이해인, <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
보통 시의 한 구절이 가장 많이 나오지만 특별한 규칙은 없다. 대형학원이 주도하는 사설모의고사에 적힌 문구는 의도가 더욱 노골적이다. 개성이 강한 건 좋은데 '작은 고추의 매운맛을 보여주마 폭풍저그 홍진호가 간다' 같은 문장을 보면 너무 장난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겠나 입시인데. 아무리 즐겁자 즐겁자 해도 즐겁기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추석특강은 뼈와 살이 녹아날 것 같은 일정으로 꽉 채워진다. 고3 입시학원 강사의 운명이다. 명절 없이 지낸지 13년. 그 어떤 설레임도 없이 특강은 늘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시작되고, 이른 아침에 시작해서 교습이 허용되는 밤 10시까지 최소한의 이동시간과 식사시간만 제외하고 빼곡하게 수업이 깔린다. 이 번 추석특강 첫 수업은 아침 8시 30분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면 11시 30분. 성대가 그리 튼튼하지 못한 나는 하루 종일 떠들고 나면 쉽게 목이 쉰다. 피곤한 몸은 미래의 에너지까지 끌어다 쓴 것처럼 노곤하고 가끔은 내일이 오는 게 너무 싫어서 죽도록 피곤한데도 쉬이 잠들지 못 한다. 가끔 수강생이 적어 수업 하나가 취소라도 되면 되려 기분이 좋아질 정도다.
한국인의 평균 수면시간은 7시간 41분으로 OECD국가 중 최하위다. 기절베개, 마약이불 같은 상품은 수면부족을 반영한 역설이다. 고등학생 수면시간은 이보다 훨씬 적어서 청소년인권단체 ‘아수나로’가 발표한 ‘2014 서울학생 휴식권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학생들의 평균 수면 시간은 5시간48분이다. 미국(10시간26분), 핀란드(8시간31분), 스웨덴(8시간26분), 독일(8시간6분), 영국(8시간36분), 일본(7시간 42분) 등 OECD 주요국가와 비교해봐도 정말 살인적인 수준이다. 실제로 한국인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이고, 청소년 사망원인 1등도 자살이다.
통계자료 몇 개만 살펴봐도, 아니 통계자료 따위 보지 않아도 그냥 직감으로 알 수 있지만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그 어느 나라 학생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공부하고 적게 잔다. 그러니 강사들도 녹아나는 추석특강이라지만, 몇 년을 매일 같이 추석특강같은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학생들은 오죽하겠나. 그저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주위 친구들이 다들 그렇게 사니 견디는거지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견딜까 싶은, 인생에서 가장 비정상적인 시기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난 학생들에게 힘내라거나,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잘 하지 못한다. 수업 시간에 졸지 말라는 말조차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교육으로 먹고 살면서 공부를 안해도 상관없다거나, 니 인생 니 맘대로 살라는 따위의 한가한 소리는 못하겠다. 내가 쓰는 전략은 두 개다. 하나는 무조건 들을만하다고 느끼게 만들어 주는거다. 재미를 주든, 지식을 주든, 교훈을 주든 들을만한다고 생각하면 듣는다. 또 하나는 나를 낮추는거다. 그게 그나마 나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너희들이 열심히 듣지 않으면 속상해서 밤에 폭식한다고 읍소한다. 그러면 학생들은 강사가 자신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훈계하는 게 아니라 동등한 눈높이에서 부탁한다고 느낀다. 학생들이 시험을 못보면 속상하듯이, 수업을 망치면 속상한 강사의 마음을 알게 되면 같은 인간으로서 예의를 갖추게 된다.
그래서 영화 <우아한 세계> 이야기를 했다.
생계형 조폭 송강호는 늙고 배나온 아저씨다. 구질구질한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은 가족이다. 집도 사고, 딸도 유학 보낸 송강호는 그럭 저럭 성공한 중년 아저씨가 된 기분이다. 롱테이크로 찍은 마지막 장면에서 송강호는 대형 텔레비젼이 놓여 있는 넓다란 거실에서 혼자 라면을 먹는다. 딸과 부인이 보내온 VHS 비디오를 돌려보며 흡족한 마음으로 미소를 짓던 송강호는 갑자기 우울해져 라면을 집어 던진다. 바닥에 흩뿌려진 라면을 한참 들여다보며 울먹울먹하던 송강호는 한참 그러다 말고 걸레를 가져와 라면을 치우기 시작한다.
대개는 그런 것이다. 라고 학생들에게 말한다. 늘 최선을 다할 수 없다. 늘 최선을 다하면 사람은 죽는다. 어떤 때는 대충 살아야 한다. 관성으로 살기도 하고, 그간 성취해 온 성과에 기대 살기도 해야 한다. 고등학생 때 공부를 하다 마음이 답답하면 샤프심을 뺀 샤프 끝으로 연습장을 긁어 찢어내는 습관이 있었다. 그렇게 하라고 했다. 답답하면 시험지를 구겨 던지라고. 그리고는 그 시험지를 다시 주워다가 펴서 문제를 푸는 게 우리 삶이라고. 그렇게 구겼다 폈다 문제를 내던졌다 풀었다 하면서 살라고. 최선을 다하는 순간이 꼭 지금이 아니어도, 입시가 아니어도 좋다고. 그래도 언젠가는 최선을 다하는 순간이 오지 않겠냐고. 우리들의 우아한 세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