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동나동 Oct 19. 2019

기술 선생님에게는 미안해요

엄혹했던 고등학교 시절, 보편적으로 잠을 보충하던 수업이 몇 개 있었다. 기술, 공업, 교련 등등 입시와 관련이 적은 과목일수록 잠의 유혹은 커졌다. 보편적이라 함은 이미 문화가 되었다는 의미다. 선생님조차 자는 학생에게 뭐라 하지 못할 정도로. 50명에 가까운 학생이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 수업. 선생님은 쉴 새 없이 의문형으로 문장을 끝맺었지만 진짜 무엇을 묻는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이디엄, 즉 관용어구였다. 돌아올 답이 없는 교실에 침묵이 내려앉기 전에 선생님은 혼자 답을 하고 또 다른 질문을 던지며 수업을 이어갔다. 그에게 매번 돌아오는 수업은, 그렇게 혼자서 자문자답하며 견뎌낸 50분은 무엇이었을까?


거의 모두가 잠을 잤고, 더러 자지 않는 몇몇은 다른 과목을 공부했다. 기술 선생님의 눈빛은 항상 처연했다. 선생님은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아니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학생들을 애써 외면하기 위해 항상 교실 뒤쪽에 걸려 있는 시계 정도에 눈높이를 맞추고 수업을 했다. 학생들을 바라볼 때보다 약 5도에서 10도 정도 높은 눈높이. 허공을 가르는,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는 공허한 눈빛.


나는 기술 선생님의 모든 질문에 항상 유일하게 답을 하는 학생이었다. 뻔히 다 알고 있는 내용을 질문하는 선생님이나 그런 질문에 답을 하는 학생이나 지치기는 매한가지였겠지만, 둘을 이어주는 미묘한 연대감. 50대 선생님과 10대 학생이 나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종류의 감정교환이 아니었을까,라고 학원강사를 하면서 생각해 보게 된다. 나는 측은지심이 강한 학생이었다. 선생님에게 측은함을 느끼는 학생이라니. 


교생에게도 그랬다. 한국에서 유일한 국립고등학교였었나? 서울사대부고를 나왔다. 사오월이면 한 반당 교생이 9명씩 배치됐다. 거의 모든 과목 수업이 교생으로 대체되었다. 애들은 대놓고 신나게 잤다. 거의 모든 수업이 기술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체벌이 합법이던 시절에도 교생은 학생을 때리지 못했다. 작정하고 개기는 학생을 다스릴 수단이, 교생에겐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모든 수업에서 나는 거의 뻔한 관용어구에도 혼자 열심히 응답을 했다. 이미 피곤했던 하루가 더 고단했다. 


남녀공학이었지만 합반은 아니었다. 여학생 반에 배정된 교생들은 행복했다. 23살 대학생을 바라보는 18세 소녀의 눈빛에는 실현 가능한 로맨스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꿈틀거렸다. 누군가는 잤지만 대부분은 똘망똘망했다. 남학생 반에 배정된 교생들은 지옥을 경험했을 것이다. 23살 대학생을 바라보는 18세 소년에게는 이렇다 할 눈빛이 없었다. 모두가 흔쾌히 잠을 청했다. 


교생이 떠나가던 날도 그랬다. 눈물과 꽃다발과 편지가 한데 섞여 제법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여학생반. 잘 가라는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드는 남학생반. 하필 남학생반을 맡은 교생들이 너무 측은해서 나는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9명에게 모두 편지를 써줬다. 그것도 모두 다른 내용을 손으로 직접.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고3이 되니 어쩔 수 없었다. 너무 피곤했다. 잠을 보충하지 않으면 쓰러질 거 같았다. 실제로 두 번 쓰러지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기술 시간에 잠을 잤다. 그냥 대놓고 잤다. 기술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되니 미안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더 측은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강사가 되어 가끔 아무런 리액션도 없이, 그 어떤 긍정이나 에너지도 없이 앉아 있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기술 선생님 생각을 한다. 그리고 말한다. 내가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강사를 그만두려고 한다. 그러니 얘들아 들어주라. 자꾸 기술 선생님 생각이 나게 하지 말아 주라. 안 그럼 나 또 집에 가서 폭식한다. 베스킨라빈스 쿼터 사이즈 한 통 다 먹고 잔다. 그러면 또 착한 학생들은 힘을 내서 들어준다. 사교육 시장에서 일한다는 자괴감? 그래 있다. 아주 많이. 모순 없는 사람이 어딨나? 그걸 외면할 뻔뻔함도 없다. 그럼에도 더 자주 드는 생각은 여기도 결국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현장이라는 것이다. 나도 존중받지 못하면 초라해지는 보통 사람일 뿐이니까. 얘들아 측은지심이라도 가져다오. 



작가의 이전글 글을 읽고 쓴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