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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동나동 Aug 24. 2019

이사


살면서 20번 이사를 다녔습니다. 대략 2년마다 한 번씩 이사를 다녔네요.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세입자를 딱 2년만 보호해주는 것은 나름 근거가 있는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법이 그래서 대략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닌 걸까요? 20번은 어떤가요? 충분히 많은가요? 적당한가요?


가끔 잠이 안 올 때마다 이사 다녔던 집들을 순서대로 떠올려 봅니다. 양을 세지는 않습니다. 20개 집은 구체적 기억 없이 그저 숫자로 환원됩니다. 그래도 어떤 집은 거기 얽힌 구체적 기억을 소환하기도 해서 기억이 구체성을 띨수록 시간도 잘 가고 잠도 잘 옵니다. 그래서 자주 20번째 집에 이르기 전에 잠이 듭니다. 당신도 해보세요. 무엇이든 20이라는 숫자로 환원시킬 무언가가 있다면 말입니다.


20개 자료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통계적 분류를 해보기에도 괜찮습니다. 전세/월세/잠만 자는 방, 다세대/다가구/단독, 1칸/2칸/3칸, 반지하/1층/2층/3층/4층 등등. 다음엔 20개 집을 길로 이어 지도를 그려봐야겠습니다. 푸드 마일리지란 개념을 본떠서 주거 마일리지란 개념도 만들어봐야겠네요.


어떻게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참혹한 집도 있었습니다. 바퀴벌레나 쥐가 나오는 것은 양반이고 심지어 화장실 문이 없거나, 겨울에 방에서 물이 얼거나 하는 집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현재로 가까워질수록 집 사정은 좋아졌습니다. 반지하에서 지상으로, 더부살이에서 월세 반전세를 거쳐 전세로 조건은 점점 나아졌습니다. 그런데도 가시지 않는 이 불안감의 실체는 뭘까요? 불안이, 가시질, 않습니다. 충분히, 풍족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입니다. 


지금 사는 집은 그럭저럭 살만합니다. 그동안 살아왔던 집들과 비교하면 살만한 정도라는 표현으로 부족할 정도로 괜찮은 집입니다. 이 집으로 최근에 이사를 왔습니다. 마침 20이란 숫자가 특별하기도 해서 이 번에는 이사 과정에서 집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생각을 많이 해봤습니다. 거쳐갔던 집에 얽힌 사건과 관계에 대해서 말입니다. 처음 자취를 시작했던 집에서는 이불도 없이 베개만으로 여름을 났던 기억이 납니다. 그다음 자취방은 차고 뒷방이었습니다. 1층을 크게 터서 주차장을 낸 빌라인데, 1층 한켠에 조그맣게 자리 잡은 그야말로 '잠만 자는 방'이었습니다. 보증금 50에 월세 18만 원짜리 방이었는데 그 보증금 50마저 다 까먹고 나왔던 기억이 나는군요. 


서른 살에 처음으로 집다운 집에서 독립을 시작했습니다. 보증금 천만 원을 내고 친구 두 명에게 빌붙어 살았던 것이나 다름없으니 진정한 독립이라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마인드가 진짜 독립하자는 사람의 마인드였습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 모으고 보증금을 마련하고 다음 이사 갈 집을 계획했으니까요. 싸구려 조립식 가구나마 월급으로 사모으는 재미가 있었으니까요. 


거쳐간 집들을 떠올리다가 부모님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어릴 적에는 이사 갈 때마다 어떤 역할을 했는지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또 그 많은 집에 살았으면서도 그 집을 지탱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나 기여를 했는지도 생각나는 바가 없습니다. 살면서 부모님께 할 만큼 했다고, 이제 미안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많은 집을 이사 다니면서 부모님도 고생 꽤나 하셨으리라 생각하니 조금 또 미안해집니다. 게다가 화장실에 문도 없는 집으로 이사할 때 그 심정은 말해 뭣하겠습니까?


그만큼 이사는 힘들고 지겨운 일입니다. 단지 하루의 이벤트가 아닙니다. 마치 내장을 전부 꺼내 다른 몸속으로 집어넣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집주인이 맘편히 보내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최근 몇 번의 이사에서는 매번 집주인과 크고 작은 다툼이 있었습니다. 세입자지만 자존심을 다치고 싶지 않은 내 고집 때문인지, 점점 욕심만 늘어가는 건물주의 욕심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체력이 좋을 때는 용달을 불러도 어떻게든 해결됐습니다. 전날까지 아무 준비도 없다가 해가 뜨면 그저 몸을 쓰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이사 후에 짐을 풀어놓는 일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사 앞뒤로 많은 시간이 듭니다. 상념은 더 많이 듭니다. 상념에 비례해서 퍼져 있는 시간이 자꾸만 길어집니다. 한참 내 돈 모아 집을 업그레이드하는 재미가 있을 때는 이사 갈 때마다 희망이 쌓이는 기분이었습니다. 지금은 이사 갈 때마다 무언가 쌓이는 한 편으로 무언가 빠져나가는 기분입니다. 채우고 채워도 비어버리는 것이 있고, 비우고 비워도 차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너무 흔한 새 출발은 이미 새 출발이 아닌 기분에 휩싸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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