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았던 소설은 왜 좋았던 걸까? 이전에는 의미를 부단히 찾았던 것 같다. 개별적인 독서 자체가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독서는 집합적 행위로써 독서의 맥락을 완성해가는 과정이었다. 지금 책읽기의 맥락은 견디기다. 또 코로나 이야기인가? 생각이 들었지만 역시, 코로나 이야기다. 코로나 없이 어떤 상상을 전개하기가 너무 힘든 때다. 2020년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훗날 사람들은 2020년을 어떻게 기억할까? 누군가는 자기 삶에서 2020년은 그냥 없는 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지금 나의 현장은 집이다. 넷플릭스나 유튜브고, 소설책 또는 수학 문제집이고, jtbc 뉴스룸이나 일간 이슬아이며, accuradio거나 네이버 나우다. 침잠의 시간 끝에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 깊은 사색의 끝에 희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생각을 한없이 묵히다 보면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법 같은 것을, 하다못해 어떤 단서를 찾아낸다고,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견디는 글읽기를 하려면 잘 읽혀야 한다. SF 장르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잘 읽히지 않았다는 의미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같은 작품도 읽다가 포기했다. 이전에는 고전이나 명작 같은 단어에 약했다. 억지로 읽었다. <제5도살장>도 그런 식으로 읽었다. 결국 이 작품을 읽고야 말았어, 라는 마음으로 꾸덕꾸덕 페이지를 넘겼다.
최근에 읽은 책 가운데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가장 빠르게 읽었다. 술술 넘어갔다. 요즘 내 마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두 작품이 오래 남았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두 작품은 내가 삶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닮아 있다, 고 책장을 덮고 생각하면 할수록 더 그런 생각이 확고해진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아련하다. 아련한 것을, 나는 좋아하나 보다.
답이 없지만 이정표를 세우는 일, 그 이정표를 따라 가지만 꼭 이루지 않아도 좋다는 마음, 그런데도 열심히 이정표를 따라 가보기, 이정표가 있음을 잊지 않으면서도 그 이정표가 절대적으로 맞는 길을 알려주고 있는 걸까 생각해보는 일, 그러니까 결국 조금은 흐릿해졌고 그러니까 아련한 느낌. 이렇게 흐릿하고 아련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순례자...>에서 뽑은 문장.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우리가...>에서 뽑은 문장.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
우주적 상상력을 동원해 인류애를 끌어올리는 소설이다. 저런 마음이란 괴롭지만 행복하구나. 이런 생각을 할 때를 떠올리니, 역시 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