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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동나동 Apr 14. 2021

열심히 하다 보면 좋은 날이 온다고?

학원강사가 되고 처음 5년은 텐션이 참 좋았다.

언제든 친구들에게 선물을 할 수 있고, 어릴 적 좋아했던 프라모델을 다시 취미로 가질 수 있고, 사고 싶은 것을 언제든 살 수 있었다. 보증금 천만 원 반지하방에서 시작된 독립은 지하에서 지상으로, 월세에서 전세로 업그레이드되었다.


무엇보다 시장이 받쳐줬다. 졸업이 임박했을 때,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수리논술 첨삭이 강사생활로 이어졌고 때마침 수리논술 시장은, 그야말로 터지기 시작할 때였다. 나날이 늘어나던 수입은 2013년 즈음 정점을 찍었다. 친구들은 와~~ 1타 강사라고 놀렸지만 그런 건 아니고, (자산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으니) 소득만 놓고 보면 그럭저럭 중산층으로 편입 가능한 수준이었다.


정점을 찍은 시장은 슬슬 내려오기 시작했다. 가만있으면 미끄러져 내려가고, 아등바등 노력하면 제자리에 있을 수 있고, 온 에너지를 끌어당겨 써야 올라가는 상황이었다. 나는 판을 갈아탔다. 그리고 강사라는 직업을 그만뒀다. 돈이 안되지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선택했다. 수입이 필요할 때 가끔 학원을 기웃거렸다.


그렇게 몇 년 새로운 도전을 하고, 적당히 실패하고, 다시 학원으로 돌아왔다. 경력단절로 인지도가 제로인 상태로, 더 떨어진 체력과, 코로나를 마주한 일상과, 더 열악해진 시장 속으로. 적당히 실패했다고 하지만 무엇도 그만둔 것은 아니다. 본캐와 부캐가 바뀐 정도랄까? 학원강사를 본캐로, 작가와 협동조합 이사장을 부캐로 사는데 본캐와 부캐 사이 간극은 그저 수입의 차이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같은 노력을 해도 훨씬 못 번다. 어쩔 수 없다. 수업 준비를 더 많이 해도 시장이 받쳐주지 않는다. 학생수에 따라 수입을 학원과 5:5로 나눠 갖는 구조라, 노동량은 그대로인데 수입은 1/3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게 처음엔 꽤나 우울했다. '니 잘못이 아니야.'라고 아무리 되뇌어도 내 탓인 것만 같은 기분이 가라앉질 않았다. 시장의 부침이야 내가 어쩔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선택은 내가 했으니까. 한동안 이런 자책이 사라지질 않았다.


부자고 되고 싶다는 마음은 원래 없다. 다만 불안하지 않은 마음으로 살고 싶고, 그 마음을 유지하기에 필요한 정도의 수입만 있으면 되는데 그게 참 어렵다. 판을 갈아탈 때 이미 각오한 일인데도 막상 경제적으로 궁핍해지니 마음도 쪼그라들었다.


20대로 돌아가서 처음 학원강사를 하던 시절이라면 이 수입으로도 그럭저럭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노력으로 더 적은 결과물이 돌아오고, 앞으로도 상황이 뻔하다면? 무력감은 수입의 절대 액수에서 오는 게 아니라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비교되는 상황에서 온다.


집에 오면 유튜브로 스타크래프트 1 BJ들의 방송을 자주 본다. 한 때 구름 떼 같은 관중을 몰고 다니며 게임 시장에서도 프로리그가 가능함을 보여주며 억대 연봉을 받던 선수들이, 아프리카 생중계를 하며 적당히 망가지고, 별풍선을 쏴주는 아재들에게 연신 "아이고, XXX님 감사합니다"를 남발한다. 유튜브 구독+좋아요를 눌러달라고 아무리 애를 써도 최상급 선수들이 구독자 30만을 넘기기 힘들다. 인기가 있는 동영상은 조회수가 10만을 넘기는 수준. 그게 딱 스타 1으로 창출되는 시장의 크기다.


그런데 그게 이상하게 위로가 되고, 더러는 즐겁기까지 하다. 한때 방송국 인기 캐스터였던 사람들이 마흔이 넘어 아프리카 BJ가 되어, 오늘은 방송 끝나면 소고기 먹고 싶으니 별풍선 쏴달라는 너스레를 떨고, 우리는 여러분이 원하는 한 오십육십이 되어도 방송하고 싶다는 멘트는 가끔 묘한 위로를 주기까지 한다.


2020년 백상예술대상, 오정세 배우 수상소감


동백꽃 필 무렵으로 상을 탄 오정세가 그랬지. 100편 모두 다 똑같은 마음으로 열심히 했는데 어떤 작품은 망했고, 어떤 작품은 상까지 받았다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잘 된 것도, 망한 것도 내 탓이 아니었다고.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꿋꿋이 자기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좋은 날이 오게 될 거라고.


오정세의 말은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 상황이 잘되든 못되든 전적으로 개인 탓은 아니다. 여기까지는 맞다. 그러나 꿋꿋이 열심히 한다고 누구나 좋은 날이 오는 것은 아니다. 오정세 멘트는 덤덤한 판타지다. 그래도 위로가 된다. 고된 반복 없이 숙련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나머지 상황에 대해서는 그냥 적당히 단념하자. 혼자서 뭘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힘 빼야 오래간다. 인생이 너무 길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을 듯하다. 계속할 수밖에 없으니 계속하는데 그런다고 좋아질까 하는 생각. 당신 탓이 아닙니다, 일단. 아마도 어지간해서는 안 팔릴 겁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한다고 언젠가 잘 되는 건 아닙니다, 당연히.


오정세도 좋고 한때 인기 있던 방송국 캐스터도 좋다  지금   있는 일을 하며 일상을 유지할  있다면, 크게 잘되지 않아도 좋다. 제발, 시장이   정도만 받쳐주길 바랄 뿐이다. 그냥 적당한 노동으로 일용할 양식을 얻고, 일을 마치면 함께 수다  친구가 있는 정도의 삶을 꿈꾼다. 의미는 부여하기 나름일 , 원래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목표나 사명 같은 것은 없으니. 본캐로 벌어들인 수입이 부캐를 가꿀 여력만 유지해 준다면  바랄  없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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