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의 마지막 50일
엄마는 눈물을 그칠 줄 몰랐다.
"도우 아빠, 불쌍해서 어떡해.."
나는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모든 상황이 꿈만 같은 비현실적인 순간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지금 이건 꿈인가..?'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 난 운전대를 붙잡고 있었다.
아빠가 다하지 못한 배달 업무를 빨리 끝마쳐야 했다. 아빠는 이제서야 암 선고를 받은 거고, 아직 나와 엄마는 할 일이 많았다. 내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아직 아빠 죽지 않았어. 병원 좋은 데 알아보고 고치면 돼"
너무도 담담하게 엄마를 위로했고, 엄마는 이내 눈물을 조금씩 거두었다.
내 이야기에 위로를 받았기보다, 엄마도 마음을 다잡아야 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빠를 오랫동안 혼자 병원에 둘 수 없기에 나와 엄마는 급한 곳만 부탄가스를 배달해 주기로 했다.
2-3곳 정도만 들리면 됐는데, 그 날따라 신호도 많이 걸리고 헤매기도 수차례였다. 이제 마지막 한 식당만 들러 부탄가스 1박스만 배달하면 됐는데 벌써 땀이 흐르고 숨이 찼다. 겨우 2층 식당을 오르는데도 힘이 들었다. 그 순간, 폐암 직전까지 이 일을 했던 아빠는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슴에 미어졌다.
어떻게 참았을까, 우리는 왜 몰랐을까 또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불 꺼진 식당 안에 들어가 마지막 부탄가스를 전달했다.
"왜 사장님이 통 연락이 안 돼요?"
"아, 사장님이 좀 아프세요."
"얼마나 아파요?"
"많이 아프신 거 같아요."
"어떡해.. 근데 최근에 많이 힘들어하긴 했어."
망치로 머리를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았다. 가족들만 모르고 주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아빠가 힘들어했고, 그걸 참으며 일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와 엄마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 이모들을 만났다. 또 한 번의 눈물바다가 이어졌다. 이모부들은 내게 말없이 어깨만 토닥여줬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진심은 알 수 있었다.
일단 엄마는 다시 병원 갈 준비를 했다. 병원에서는 암 정밀검진을 위해 폐 조직검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했고, 며칠 동안 아빠는 입원을 해야 했다. 코로나19로 인해 보호자는 1명만 출입이 되니 엄마만 병원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직 암이 얼마나 진행이 됐는지, 어떤 암인지 확실히 알아야 추후의 치료 방법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일말의 희망을 걸고 엄마를 병원에 데려다줬다.
그리고 아직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임신 중인 내 여동생이다.
이제 아기가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만삭의 산모였다. 엄마는 만일을 위해 최대한 늦춰 이야기하자고 했다. 나도 어느 정도 동의했지만, 너무 늦게 알려주면 서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 폐 조직검사 결과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동생은 예쁜 공주님을 품고 있었다. 아빠는 참 아기를 좋아했다. 비극과 희극이 함께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