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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도 Aug 25. 2021

해 진 날 속, 해진 운동화 위의 나

비 오는 날의 생각들



#1.


나의 신발은 항상 뒤꿈치가 해진다. 구멍 난 천을 쓸어 만지며 나는 바닥을 지탱하고 서기보다는 뒤로 물러서기만 하는 사람인가 고민한다. 매일 저녁 해 진 뒤마다 욱신거리는 종아리를 주무르며, 밀려오는 후회의 감정들을 상대하는 건 수백의 밤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에게 여유를 가르쳐주고자 했던 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여유만을 찬양하다 떠나갔다. 난 그들의 보폭에 맞추어 더 높이 무릎을 끌어올리고, 더 느리게 엄지발가락을 내보내 봤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그 시간에마저도 내 젊음을 스쳐 보냈음에 탄식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신발이 담아내지 못한 소모된 내 젊음은 매번 밑창보다 뒤꿈치가 먼저 닳아버리고 만다. 

쨍한 낯을 스쳐 보내고 뒷걸음질만 치다, 해 진 뒤에야 머리를 들이밀어 보려고 해진 운동화 위에 발바닥을 꾹 붙여보는 나.




#2.


정말 오랫동안 너를 생각했다.

너의 존재, 너의 사랑, 너의 아픔. 


별로 아파하는 것 같지 않는 너의 모습에 상처를 받다가도, 아파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나의 무딤이 누군가에게 이런 고민을 안겨주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다가도, 모든 게 엉망진창이라 생각을 멈추다가도. 


그러다가도, 네가 사랑에 아파하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아픔을 내게 다 보여주며 열을 가라앉히려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의 밤이 지나가 소매만 부여잡고 눈을 크게 치켜뜨려고 노력하는 날이 있더라도, 감정 때문에 차마 표정을 관리할 수 없어 입 안 가득 노래를 욱여넣는 날이 있더라도. 그래도 우리가 사랑에 아파하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3. 


와르르 쏟아지는 것들은 나를 깔아뭉갠다. 그것이 캔 더미이든, 물줄기이든, 빗방울이든, 그 무엇이든. 형체가 없는 것은 가벼워야 하는데, 더 무겁게 뭉개고 만다. 물줄기는 닿으면 따갑기라도 하는데, 감정들은 느껴지지도 않는 것이 그렇게 상처를 입힌다.


나의 감정들을 덜어낸다. 더 가볍게, 더 가볍게. 누구의 살갗에도 따갑게 느껴지지 않도록. 그러나 나의 것들은 가벼워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만 두껍고 크게 뭉친다. 주체하지 못하는 덩어리에 짓눌리고 마는 건 결국 내가 된다. 


드러내지 않고 꼭 숨기고 가둬내는 게 맞는 걸까. 준만큼 받아야 하는 게 아닌 걸 알면서도 가벼이 드러난 내 마음에 마저도 짓눌린다. 그래서 누군가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슬픔에 또 다시 깔아뭉개진다.




#4. 


납작해진 영혼을 보고 생각한다. 

아, 이렇게 납작한 곳에도, 여전히 붙어있을 수 있는 삶이 있구나. 


날마다 조금씩 쪼개져 밀려오는 아픔을 견디기에도 쉽지 않은데, 한순간에 납작해지는 것이란 필히 그 수배의 아픔을 견뎌야 하는 것이었으리라. 무게에 쫓기고 쫓기며 점점 좁은 곳으로 향하는 것보단 한순간에 납작해져 어디든 쑥 들어가는 게 쉬웠으려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납작해진 영혼을 지나치고,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지우고, 곧바로 납작하게 썰린 고기를 먹고. 납작해진 빨간 덩어리가 싫다가도, 동그란 흰색의 것들은 입안으로 집어넣고 마는, 아직 납작해지지 않은 영혼이 여기 있다.


달리는 바퀴 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는, 이렇게 가벼운 말들밖에 내어놓을 수 없어서 역겨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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