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져 버린
가을은 홀로 있는 걸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계절이다. 허전한 옆구리에 코트를 꽁꽁 싸매도 그 누구도 이상하게 보는 일 없고, 따뜻한 차로 몸과 마음을 데워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계절이니까. 그렇다고 홀로인 게 너무 외롭지만은 않게 가끔 닿는 햇살도 기분 좋고, 머리 위에 떨어지는 색색의 잎들도 단조롭지 않아 좋고.
모든 게 과하지 않은, 적절한 깊이에 익숙해져가는, 가을이 좋다.
가을이 좋아하는, 집에서만 입는 맨투맨에 푹 감겨 있다. 손목을 걷어올려야 움직이기 편할 텐데도 걷어올리지 않고 손목을 꼭꼭 감췄다. 손을 크게 움직이지 않는 일만 하기에 딱히 문제 될 게 없다. 눈이 감길 땐 그냥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도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 익숙하다. 익숙함으로만 가득한 하루이기에, 눈을 뜨지 않고도 잘 살아간다. 피아노 건반을 누를 때도 눈을 감고 있다. 검정 다음에 흰색, 그다음엔 검정이 온다는 걸 안다. 도는 미와 솔과도 잘 어울리지만 시 플랫과 미 플랫과도 잘 어울린다는 걸 안다. 내 방엔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많다.
익숙한 것들과 함께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처음 느끼는 것들에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건, 그런 낯 섬조차도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한 해가 익숙해져 가는 단 하루의 가을이다. 새로운 네 자리 숫자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다이어리에 잘못 날을 써넣는 일은 없는 가을.
내가 좋아하는 가을은,
아침으로 전날 밤 쪄둔 고구마를 먹는.
햇빛에 좋아하는 소설을 읽는.
크리스마스 생각에 들떠 재즈 캐럴을 듣는.
종아리에 스치는 트렌치코트를 즐기는.
가죽부츠와 빵모자와 핸드 워머를 입을 수 있는!
이게 내가 좋아하는 가을이다.
좋아하는, 단 하루의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