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때는 창경원이라고 불렀고 동물을 구경할 수 있는 유일한 곳, 지금의 창경궁이다.
창경원 나들이는 그 해 최고의 날이었다.
어머니는 김밥을 준비하신다. 재료를 넉넉히, 아니 너무 많이 넣다보니 그 김밥을 먹는 입모양새는 절대 예쁠 수 없다만 몇 개만 주워먹어도 속이 든든하다. 그러나 동물원을 구경할 생각에 김밥과 삶은 달걀대신에 사이다만 연신 들이킨다.
어머니는 소풍날, 왜 한복을 입으셨을까
사진은 뺄 수 없는 증거다.
살아계시면 그 이유를 여쭈고싶다. 동물원과는 어울리지않는 복장이나 참 고우시다.
사진속의 우리 가족 특히 나의 얼굴은 기쁨과 환희 그 자체다.
감사하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데다 창경원은 집에서 그렇게 멀지않은 거리이기도 했으니 1년에 한 번은 꼭 가보았으리라.
고등학교에 다닐 때 딱 한 번 창경궁을 들어 가보았다. 간도 크게 당시 금지되었던 미팅을 했는데 시커먼 교복을 입은 남학생, 여학생들 서로 대면대면하다 끝난 접선이었다. 동물보다는 사람에게 그것도 이성에게 관심 갈 한창때이나 창경원도 싱겁고 이성도 싱거웠는지 기억나는 것은 까만 교복에 무거운 책가방뿐이다.
어느 해였을까 아마도 대학생 즈음이라고 기억된다.
“창경원이 왠말이냐, 나라의 수치다. 이제라도 바꿔야한다” 란 뉴스가 나오면서 동물원은 과천으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창경궁에 대한 관심도 더불어 옮겨졌다.. 규모가 대단한데다 당시 내 나이는 비명을 질러도 짜릿하게 만드는 놀이기구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이후 내 기억에 창경궁은 역사적 의미가 크지만 창경원이란 이름이 더 빨리 나오는 그런 심심한 정원이었다.
최근 서울에서 지붕없는 박물관이란 성북동을 찾았다. 이곳 저곳을 돌고 내려오니 혜화동, 내친 김에 창경궁을 들어가보기로 했다. 다른 궁궐이 일찌감치 문을 닫는 것과 달리 창경궁은 비교적 여유있는 관람시간을 준 덕분이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게 왕의 집무실이라는 명정전이다.
드라마에서 나온 장면을 상상해본다.
영의정, 우의정같은 정1품은 맨 앞에, 판서라는 정2품은 문 가까이 자리했을텐데 회의시간동안 방석위에 양반다리를 꽤 오랫동안 했다치면 무릎과 관절에 그닥 좋은 자세는 아니었겠다.
매일 왕과 대하는 지위라고해도 낮은 조명과 거리두기에 왕의 얼굴, 즉 용안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을 거라는 상상도 해본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행사가 취소되었지만 사설업체 해설사분들의 재미난 이야기는 다행히 진행되었다.
“이것은 불을 끄는 드므예요. 화마() 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놀라 도망간다고 해요”
건물앞에 서너개씩 놓인 드므도 제 값을 못했는지 창경궁은 알 수 없는 화재가 여러 번이었단다. 세종때 지어지긴 했으나 이후 화재, 소실, 임진왜란, 소실을 반복하더니 정조때에 와서야 지금의 모양새를 갖추었단다.
순종때 일본이 동물원과 식물원을 들여놓았다고 하니 사람으로 따지면 사연도 많고 기구한 운명, 그럼에도 그 우아함과 품위는 곳곳에서 느껴진다. 귀한 대접을 받아 온, 뼛속까지 명문이란 말을 더하고 싶다.
영화 ‘사도‘에서 나왔던 문정전을 지나친다. 어떤 상황이든 결과적으로 자식에게 너무 모진 선왕 영조다. 뒤주에 가두라고 명했던 아버지의 마음인들 편했겠냐면서도 훈육의 방법이 지금의 시각으로는 옳지않아보인다. 방금 전 우아함과 뼈속까지 명문이라 감탄한 곳곳의 품위는 그 문정전에서 할 말을 잃었다.
가장 안쪽에 위치한 왕비의 침소라는 통명전의 불이 들어온다. 잠자리에 들어 가기 전 하루의 고단함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 쉴 왕비가 그려진다. 머리에 온갖 장식과 단 하나의 머리카락도 흘러내림없이 정갈한 모습, 스무살이 되기도 전에 국모가 되었으니 그들이라고 고단함이 없었을까.
통명전 역시 500년의 세월동안 기품과 휴식만 있었던 건 아니다. 희빈 장씨의 인현왕후 저주사건도 이 곳과 관련있다고 한다.
창경궁의 하이라이트는 춘당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식정원으로 조성되었다가 해방이후 연못만 남겼다고 하는데 연못이라고 하기에는 제법 크고 호수라고 하기에는 아담하다. 빨갛고 파란 청사초롱이 잔잔한 연못에 비추이니 어디가 수면인지 어디가 지면인지 알 수가 없다. 그저 파랑과 빨강 천으로 덮힌 빛일뿐인데도 관람객들의 마음은 설렌다.
이제 곧 폐장이란다. 처음 들어 온 홍화문으로 돌아가는 길, 방금 설레게 했던 청사초롱도 불빛도 없다. 도시의 저녁이 이리 깜깜할까싶을 정도로 암흑이다. 발 끝에 닿는 흙의 촉감이 없다면 여기가 어디인지 모를성싶다.
조선시대 궁궐의 밤은 더더욱 어두었을터이니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긴장했을게다. 다같이 군주를 섬기고 모시는 최고의 조직이지만 왕좌와 관련한 이권은 천갈래 만갈래, 때로는 그 바스락거림이 동지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 않았을까
잠깐의 둘러봄, 길지않은 궁궐의 산책이었는데 마치 500년을 걸어온 듯한 피곤함이 갑작스레 몰려온다.
궁궐에 오면 흔히들 이런 농담을 한다.
“ 어릴 때 여기서 살었던 기억이 난다. 전생에 나는 공주였나, 아니면 왕비였나봐”
전생이란게 있다면 나는 무엇이었을까 아니 무엇이었다면 좋았을까
왕가였다면 최고겠지만 말 그대로 전생이다. 무엇인들 이생과 비교할 수 없으리라.
지금은 역사책에서나 대하는 500년의 조선왕조, 그 생애에서는 최고의 권력과 최대의 혜택을 받았겠지만 왕년이다. 더구나 아무리 잘했던 왕도 후대의 평가는 냉혹하고 객관적이다. 때에 따라서는 역대 최고가 역대 최하로도 바뀌기도 한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아오고있는지 후대에 어떤 인물로 기억될까를 생각해본다.
대단한 삶은 아니지만 당장 나와 함께 수십 년을 살아 온 가족, 친구들, 지인들에게 나의 이름은 어떤 이미지로, 어떤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을까.
나의 바스락거림에 놀라기보다 반가워하기를, 내가 밝히는 한 밤의 등불이 누군가에게는 안도의 한숨을주었으면 하는 소소한 바람을 얼른 가져본다.
그것에 하나 더 얹어본다. 나는 말걸기 어려운 사람이 아니기에 나의 행보에
“ 그러면 안되는 줄 아오.” 혹은 “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되오” 라고 적절한 훈수와 격려를 줄 누군가가 내 주변에 있었으면, 적어도 그 사람만큼은 믿고 내 행보를 보여주었으면 좋겠다란 욕심도 가져본다.
인생을 비유하는 많은 것들 가운데 나는 “숲” 이란 단어가 와닿는다.
멀리서 바라보는 숲은 무성 그 자체다만 막상 그 숲 안에 들어서면 무성함은 보이지않는다.
그 끝을 알 수 없기에 그저 사람이 지나간 듯한 흔적을 믿고 따라갈 뿐이다.
전생의 왕도, 전생의 아무개도 그렇게 살아갔을테고 가끔 숲 어디선가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이 담긴 한숨을 내쉬기도 했을게다.
‘나. 잘 하고 있는 것일까’
‘나,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왕과 왕가를 보필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창경궁의 문이 닫힌다.
어릴 적 들뜨게 했던 창경원
청소년기, 심심했던 창경원
역사 속 인물들을 마주했던 창경궁
같은 장소임에도 매번 다른 사람들과, 다른 느낌으로 와닿은 궁궐의 밤이 저문다.
사람도 떠나고 왕위와 신분도 모두 떠났지만 그 자리는 여전히 말없는 증인들이 서있다.
나무와 흙, 건물, 하다못해 작은 돌들이 그 증인이다.
나 역시 그들의 선한 증거물이다. 어제까지 어떻게 걸어왔는지는 왕년이다.
지나간 것은 훌훌 잊고 처음 들어 온 입구를 향해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고 품위있게 나아가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