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동네가 아닌 산(alive)동네
연식이 된 이야기라 늦게 태어난 이들에게는 사극인가...하겠다만
난 산동네 출신이다.
요즘은 산동네란 주소도 달라지고 심지어 어떤 동네는 담벼락에 예쁜 그림이며 빨간 벤치를 갖다놓고
photo zone이라고 해서 TV에도 나오드만 내가 살던 산동네는 못사는 이웃들이 모여살던 곳이었다.
지금 서울하면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의 공시지가가 왠만한 동네의 집값보다 높지만 70년대만해도 명동, 종로시내에서 가까운 강북이 선발주자였다. 이후 송파 강남 양재 목동의 순으로 개발된 것 같다.
잠실에 사는 친척이 놀러왔는데 주소가 오단지라고 해서
" 단지가 뭐야? 동네이름이 00동으로 안끝나? 단지야 장독대야?"라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삼천포로 빠졌는데 산동네에서는 아랫동네로 내려가는 게 신분변화였다.
산동네에서도 잘사는 집은 대문이라고 볼 수 있는 대문이 있었다.
그 집의 하나가 우리집이었다. TV가 있었고 까만 피아노가 있었다고 하면 게임 끝!
읍정도 되는 지방에서 잘~살다가 하루아침에 몰락한 중산층이었다는데 그 때문인지 가전은 말고
당시 말로 세간살이가 많았다. 내 어린 기억으로 피아노뒤에 숨어서 숨바꼭질을 했던 것 같다.
그 피아노는 숨바꼭질만 했던 게 아니었다.
도둑이 들었었는데 친정엄마가 이상한 인기척에 놀라 누구야?소리를 냈더니 피아노뒤에서 남자가 후다닥 도망가더란다. 그 후론 피아노를 벽에 딱 붙혀놓아 다른 곳에 숨어야했다.
대문이 있는 산동네 부자면 뭐하나 물은 공평하게 모두가 먹을만치 아랫동네 어디선가로부터 낑낑거리며
가져왔는데 그게 제일 힘들었고 남자인 아버지가 담당했다.
물이 귀하니 마실 물은 부엌 항아리에 고이 모셔놓고 빨간 고무다라의 물은 쌀씻고 세수하고 빨래하고 걸레빠는 순서로 아껴썼다.
허푸허푸 물을 튀겨가며 쓴다거나 모르고 확 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소꼽놀이를 하다가 물이 필요해서 소꿉바가지로 항아리에 담긴 물을 떴다가
5초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좋게 말해 화들짝, 한마디로 경기였다.
" 아니, 그 흙 묻은 걸로 이 물을 뜨면 어떻해?"
글에 소리를 담을 수 있다면 화들짝-경기가 어떤 느낌인지 알텐데 아쉽다.
내 눈에는 맑은 물인데 엄마의 눈에는 흙 알갱이 하나하나가 다 보이셨는지
다음 물이 배달될 때까지 꽤 오랫동안 물 근처에도 못갔던 기억이 있다.
산동네라고 해서 전기가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
00야, 밥먹어라 할 때까지 전봇대등 아래서 매일 놀았다.
" 원숭이 0구멍은 빠~알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지금은 기억하기힘든데 아이들이 모두 손을 잡고 원을 만들어 놀다가
누군가 00하자하면 또 얼른 다른 놀이로 바꿨다.
그 창의적인 놀이는 어제해도 재밌고 오늘 내일 계속 이어졌다.
친한 이웃이 아랫동네로 이사가게 되면 부러웠다.
학교가는 길에 보였던 그 평평한 땅위에 존재된 많은 것들.
평평한 땅위에 지어진 집이며 문방구며 그 길가에 노는 아이들이 부럽기는 했다.
내리막길 오르막길이 없다는 건 비탈진 곳곳에 갸우뚱하게 지어진 산동네아이들이
겪는 불편함도 없다는 거다.
구슬치기를 할라치면 또르르 내려가던가
비석치기를 해도 어느 순간 비석이 픽하고 쓰러진다거나
무엇보다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온다는게 최고의 차이였다.
우리가족도 다행히 형편이 좋아져서 아랫동네로 내려와 한동안 세로 살게되었는데
아마 그 집 주인이 부모님에게 삶의 의지를 불러일으켜 준것 같다.
그래도 산동네에서는 어엿한 대문부잣집이었는데 주인집 아줌마에게는
그냥 세들어 사는 이였다.
물쓰는게 아깝고 마당의 흙을 밟는 것도 아깝고 심지어 화장실을
쓰는 것도 아까워던 탓인지 제일 어린 내게 화장실 귀신 이야기를 정말 여러번 했다.
내가 겁먹은 표정을 지으면 아줌마는 만화처럼 푸하하 웃었다.
그러면서 또 한 번 "빨간 휴지줄까, 파란 휴지줄까" 를 연기했다.
주인아줌마가 세든 우리들에게 못되게 군 덕분에
강북의 우리집이 하루라도 빨리 생긴 셈이다
이후 산동네로 돌아갈 일은 없었지만
제일 그립고 추억이 많은 곳은 희한하게도 산동네다.
" 얘, 어디가서 산동네 살았다고 하지마. 못산 건 티낼 것 있니?"
이십대 결혼을 앞둔 언니가 말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산동네는 내가 살면서 가장 가고픈 시간을 가졌다.
있다고 내세울 것도 없고
없다고 주눅들것도 없는 그냥 파란 대문집, 피아노집, 00네 집이었다.
엊그제 한성대입구역부터 시작되는 삼선동 369성곽마을을 다녀왔다.
참 예쁘고 아기자기한 동네인데 우리처럼 시도때도 없이 오가는
관광객들때문에 이들의 일상은 방해되겠다싶었다.
이 좁은 골목, 계단이 만들어지기전에는 어린 아이들이 모여 놀았을 비탈진 경사길.
동네 어르신들은 내내 바같에 모여 야한 이야기, 속상한 이야기 터놓다가
올라 오는 사람 내려 가는 사람 이름 불러가며 같이 걱정해주고 대견해해주었을.
내 살던 산동네가 이렇지않았을까
원래는 평평한 들판지역으로 조선시대부터 군사 훈련장이자 운동장으로 최초 축구경기
자전거 경주대회가 열렸던 곳이라는데 지금은 평평하지않다.
성곽에 팔을 괴고 보면 마주하는 동네가 있다.
더 위에, 더 견고하게 지어져 성곽을 내려다보는 형세인 집들이다.
한양도성은 조선시대인데 70년대의 건축과 묘하게도 잘 어울린다.
산동네에 살았다는 것, 못살았다는 것을 티낼 이유있냐고 20대의 언니는 말했지만
난 山동네에 살았다는 게 여전히 소중하고 여전히 티내고싶다.
젊은 엄마, 아버지가 있었고
우리집에 모여 홍수환인가?
누군가의 권투시합을 보러 모여 잔칫집이었고
김장날 아줌마들 모두 모여 잔칫집이었고
도둑이라해봐야 쌀이나 탐낼 위인이었고
밤늦게 놀아도 다음 날 늦잠한번 잔 적없는 생생한 체력의 우리들이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후진 집에서 훨씬 후진 음식과 열악한 집안형편에도
항상 맛있게 먹고 행복한 웃음만 가득했던 것 같다.
찬물도 뜨거운 물도 콸콸콸
도어락하나면 그만인 방범에
초고층도 5분이면 올라가는 이 편한 세상에도
못누리는게 있더라.
山동네가 아닌 산(alive)동네, 그 때문에 행복했겠지.
땅값.집값이 행복의 기준과 순서가 되지않던
그때가 진짜 살아있는 동네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