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함께 춤을
주된 수입이던 아버지의 돈벌이가 시원치않은 때가 있었다. 당연히 어려웠다.
입 벌린 자식이 여럿이니 어머니는 바가지를 긁는 대신 당신이 할 수 있는 돈벌이를 시작하였다.
왕년의 무용선생이었던 어머니가 사교댄스를 직접 가르친 것이다.
문제는 장소. 학원을 차릴 여유가 없으니 우리 집이 교습소로 사용되었다.
늦은 아침부터 이른 오후까지 집안은 어른 남녀와 딴따라음악으로 채워졌다. 막내였던 내가 하교 후 매일 보는 장면이었다.
어머니는 내 눈치를 살피면서 아버지에게는 절대 말하지말라 당부하셨는데 비밀이라는 그 단어가 곧 불법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딴따라 음익에 맞춰 “하나, 둘, 셋, 넷” 어머니는 돌리고 여자들은 돌았다. 간간히 들리는 그 웃음소리가 좋지않았다.
어떤 날은 여자들만 어떤 날은 남자도 있었다. 아버지가 없는 집에 어른 남자가 있다는 게 왠지 모를 부끄럼이었다.
어느 한 날, 학교에서 누군가가 내 어머니의 일을 흘리듯이 말했다. 그의 어머니가 수강생이었는데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 화를 내고 딴청을 부렸다. 내 어린 마음에 왜 어머니는 춤꾼일까, 왜 남자와 춤을 출까 길바닥에 걸린 돌이란 돌은 다 차도 성이 안풀렸고 그 꿍꿍한 속내를 누구와도 나눌 수 없었다.
어머니의 교습은 가사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고기반찬이 올려 진 밥상, 형제들의 대학등록금을 제 때 낼 수 있는 현실, 그럼에도 그 돈의 출처에 침묵하는 현실, 내 청소년기는 풍요롭기도 우울하기도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어느 모임에서 두 남녀가 지루박을 추는 모습을 보며 한동안 잊었던 어머니의 사교댄스가 생각났다.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는 두 사람은 짧은 인사와 함께 제법 긴 한 곡을 소화했는데 절제된 동작이 주는 경쾌함, 아름답고 우아했다. 무표정한 얼굴임에도 그들이 충분히 소통하는 게 느껴졌다. 어릴 적 흘겨보았던 사교댄스가 비밀스런 ‘춤바람’이었다면 그 둘의 춤은 말 그대로 사교였다. 새삼 깨달았다. 지루박, 차차차와 같은 사교댄스가 얼마나 흥이 많은지, 음악과 박자, 동작의 일사분란함, 파트너를 배려함, 복장까지 더해 플로워를 제압하면 볼룸댄스란 영어명칭이 제대로 와닿는다.
춤, 춤. 춤이라. 갑자기 춤을 추고 싶어졌다. 혼자가 아닌 둘이 소통하며 즐길 수 있는 그런 춤, 몸치에 평소 손을 잡을 일이 거의 없는 무덤덤한 우리 부부는 그렇게 탱고란 어려운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다. 나름 획기적인 도전이었다. 주말마다 한 시간을 달렸던 것도, 부부만의 연습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체인지 파트너가 되는 상황도 그랬다. 초보 두 사람의 춤은 발이 겹쳐 뒤뚱거리거나 너무 힘을 주어 손을 잡는 통에 부들부들 떠는 등 형편없었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갈수록 춤이 주는 대화가 상당히 상냥하고 까불스런 여자의 발차기가 상대방이 아닌 자신을 홀릴만큼 매력적이었다.
탱고를 말하자면 영화 ‘여인의 향기’를 빼놓을 수 없다. 실명()위기의 대령(알파치노분)이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탱고를 추는 그 장면과 음악은 영화내용을 덮을 정도로 워낙 유명하다.
“따라라리리~”로 들리는 영화음악의 원제는 por una cabeza,(포르우나가베사)로 ‘간 발의 차이’ 라는 뜻이다. 1935년 아르헨티나인 카를로스 가르텔이 작곡된 이 음악에 맞춰 두 배우가 아름다운 춤사위를 보여주지만 사실 가사는 가슴아픈 실연()이다. 경마에서 간 발의 차이로 승부가 갈리듯 연인들의 관계도 간 발의 차이로 사랑의 결실을 혹은 이별을 한다란 내용이다.
“(중략)...모든 슬픔을 지우고 쓰라림을 가라앉히겠네....”
가사를 알고 영화의 해당장면을 보면 실명()은 곧 실연, 헤어짐이다. 사랑하는 세상, 마지막이다. 사랑하는 사람, 마지막이다. 마지막이란 이 단어에는 절박함이 있다.
탱고가 시작된 건 아르헨티나의 항구주변, 이민자들이 가진 향수와 연인들의 사랑을 위함이라고 한다. 당시 남자들의 탱고복장은 긴 부츠와 쇠 발톱, 여자들은 풍성한 치마를 입었는데 과하다고 느끼는 몇 가지 탱고 동작이 그 복장 때문에 나온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탱고는 혼자 혹은 무리가 어우러지는 여느 민속춤과 달리 파트너댄스다.
리드는 남자의 몫이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돌리거나 잡아 당기지않고 파트너인 여자를 최대한 편하게 해줘야한다. 다른 팀과 부딪히지않도록 어디로 가야할지 다음 동작은 무엇을 해야할지 순간 순간 판단한다. 남자의 말없는 힘 조절과 방향에 여자는 까불스럽고 화려한 발차기로 밀당을 한다, 탱고의 매력은 추는 자와 보는 자 모두에게 공평하다. 탱고의 동작이 까불스럽다면 음악은 반전이다. 탱고음악의 악기인 “반도네온”이 가슴을 울리는 구석이 있다. 1800년대 말 세계 어느 나라가 편했겠냐만 정치 경제적으로 불안한 아르헨티나에 이 반도네온의 구슬픈 선율은 가난과 고됨을 충분히 위로해주었으리라.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된 후에 깨달았다. 부모의 생활력은 부모의 의무라는 것. 배불리 먹이고 잘 키우기 위해 필요한 돈, 부부는 누구더라도 발 벗고 니서야 한다. 춤을 배우고 가르쳤던 우리 집이 교습소로 사용된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겠다. 어머니나 수강생중 바람나거나 문제를 일으킨 후일담이 없으니 어머니는 좋은 선생이었고 좋은 학생들이었겠다. 딴따라 음악이 싫었던 건 어린 내 취향이 아니기에, 어른 남녀의 어울림이 싫었던 건 아버지에 대한 의리감정도가 아니었을까
남편의 손을 잡고 탱고를 춘다. 처음보다 힘을 빼니 상냥하고 부드럽다. 그를 믿고 움직인다. 남자만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과 달리 남자는 주변을 살핀다. 마치 긴 부츠에 쇠 발톱이 달린 양 무겁지만 어른의 몫이다. 남자만 바라보며 추는 탱고의 특성, 그 어깨너머가 궁금하고 불안하나 그 또한 어른의 몫이다. 풍성한 스커트사이로 나의 발을 까불어보는 것으로 불안감을 달랜다.
“간 발의 차이” 는 연인들에게만 있는 간절함이 아니다. 자식은 더 간절하고 더 절박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지켜야했던 자식들, 어린 자녀의 눈치를 보면서도 절박했기에 “하나, 둘, 셋, 넷”를 멈출 수 없던 어머니, 간 발의 차이, 이젠 잡을 수 없는 어머니의 손, 어머니가, 어머니의 춤이 더 그리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