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들과 같이 점심을 했다.
친구들이 만난 것 이상으로 많은 대화가 오가서 내가 끼어들어 갈 틈도 없었다.
그래도 막내조카가 사준다니 고맙다 맛있다란 인사는 잊지않으셨다.
다들 주름치마처럼 주름이 쪼글쪼글하신 노인들이지만 우애가 좋아 자주 만나고
한 때 이모들끼리 애들 등록금을 번다고 시작한게 잘못되는 바람에 혼쭐이 나기도 했던 추억아닌
추억도 공유하고 있는 유난스런 자매들이다.
딸이 넷, 아들이 둘이셨던 외할머니는 딸들과 전혀 다른 온유한 성품으로 이모들이 난리통을 만들었을 때
당신 최고의 욕을 하셨다.
" 여펀네들이 얌전하게 살림이나 할 것이지"
덕분에 외할머니와 1년간 살 수 있었고 어릴 적 엄마 애기를 들을 수 있었다.
" 니 엄마? 맨날 돌아다닌다고 할아버지한테 혼났지"
나의 친정어머니는 할머니의 증언처럼 돌아다니는 것을 엄청 좋아하시고 아주 외향적인 분이셨다.
집에 들어오면 우리집의 현관은 낯선 신발이 수북했다.
'우리집에서 또 모이는구나'
왜 아줌마들은 저렇게 파하하하 우하하하 푸하하하 배꼽잡고 웃을까
별것도 아닌 것 같은데 뭐가 저렇게 재밌을까
그냥 말하면 될 것을 바닥에 눕고 시늉을 하고 또 박장대소를 하고
엄마의 사교성에 비하면 나는 극도의 소심함,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내 어릴적 기억에도 우리집 대문은 늘 열려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특히 산동네에 살 때는 그 당시 귀하던 tv가 있는 집이었고 일제 제빵기가 있는 집이었으니
사람들이 모이는 건 당연했다.
막내였던 나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 부모님을 따라다녔는데 여행지든 친척 모임이든 숟가락 하나로 가수가 되는 부모님을 여러 번 목격했다. 술 한잔만 들어가면 모두 가수가 되던 시절이었으니.
두만강 푸른 물에~섬마을 소녀~동백아가씨~
초등학교 4학년은 그런 노래들을 일찌감치 그리고 오랫동안 들어왔다.
흥이 넘치고 사람좋아하고 낯선 이와 쉽게 친해지는 그런 엄마가 변한 건 중년이후 교회를 다니시면서부터였다. 엄마 인생은 가족과 교회로 좁혀졌다. 그 좋아하시던 친목모임, 돌아다님 모두 관심밖이었다.
나이가 들면 새벽잠이 없어지는 줄 알았다. 그 정도로 엄마는 새벽기도에 열심이고 꾸준하셨다.
한 겨울이었고 아버지가 아프셨던 것으로 기억되는 날,
명색이 딸인 나도 새벽기도를 가야겠다란 생각으로 같이 길을 나섰다.
눈이 떠지지도 않아 갈지자로 내가 걸었는지 다리가 걸었는지도 모르게 교회를 갔다.
나는 벌써 기도가 끊어져 사르르 잠이 드는가했는데 엄마의 기도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 나른한 목소리에 또 취해서 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했다.
남편을 위한 기도
자녀를 위한 기도
자녀의 자녀를 위한 기도
당신을 위한 기도는 없었다.
엄마는 늘 이렇게 자녀와 남편을 위해 기도하셨겠구나.
기복신앙이야 아니야하든 정수를 떠놓고 기도했던 어머님들처럼 종교란 가족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속일 수도 속일 필요도 없는 게 아닐까
그건 본능이니깐.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데 교회 젊으신 목사님의 부인인 사모님을 만났다.
새벽기도의 자리를 늘 채우신다고 너무 감사하다고, 딸이 그런 좋은 신앙이어받았음한다고..그런 덕담을 주고받는데 사모님의 시선이 아래로 향해지더니 이내 의아한 눈빛이다.
엄마가 신고계시던 신발, 한쪽은 털신, 한쪽은 검정신이다.
사모님의 눈빛은 어머니가 치매...? 그런게 아닌가란 의심이었다.
내게 살짝 어머니 괜찮으시냐란 걱정도 해주셨다.
사실 좋게 좋게 표현했지만 순간 상대방의 심중은
" 정신 나가신거 아냐?" 그거였다.
" 내 정신 좀 봐. 내가 아빠때문에 잘 못자고 그래도 기를 쓰고 새벽기도를 가야하니깐..." 엄마의 너털 웃음에
사모님도 마지못한 인사로 헤어졌지만 엄마의 짝짝이 신발, 그리고 노인을 이해하지못했던 젊은 사모님의 시선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위에 쓴 엄마와 이모, 새벽기도 이야기는 모두 오래 전 이야기고 리바이벌이 되지않는 상황이다.
모두 돌아가셨으니 엄마의 어릴 적 이야기도 이모들과의 난리도 이젠 카더라통신이다.
막내인 탓에 친정엄마를 친구들보다 일찍 여의다보니
"우리 엄마 왜 이러시냐. 우리 엄마 요즘 짜증난다..."의 푸념도 부럽고 얄미울 때도 있다.
" 살아 계실 때 잘해라. 한 번이라도 더 전화하고~" 란 내 진심어린 충고도 한 귀로 흘리는 그들이다.
엄마 뭐 하셔?
엄마 식사는 하셨어?
약은 챙겨드시고?
이 사소한 몇 마디가 너무 너무 하고싶을 때가 있다. 엄마의 핸드폰을 꽤 한참동안 해지하지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갑자기 엄마가 보고싶어.
갑자기 엄마 목소리를 듣고싶어 그런 때 그냥 엄마 핸드폰 번호를 눌러보았다.
엄마.엄마계신 곳은 어떠우?
춥지는 덥지는 않으셔?
여전히 사람좋아하시지?
엄마집엔 신발이 수부룩하겠네
김혜자씨가 나왔던 "눈이 부시게"란 드라마에서 이런 대화가 오간다.
" 엄마, 갱년기는 힘들어?"
며느리 역할의 이정은이 미장원 수건을 개다말고
" 힘들지. 힘들지. 갑자기 불이 확 났다가..."
왜 딸이면서, 같은 여자이면서 우리들은 엄마의 갱년기에 그렇게 무관심했을까?
엄마는 늘 엄마이고 강한 사람이고 태어날 때부터 엄마였을 성싶고 엄마의 소녀적 아가씨때 이야기는
드라마보다 덜 궁금해했던. 나이들어감조차 공감이 덜했던.
어느 날부터인 엄마가 한 설거지가 깨끗하지못하다싶어
"엄마, 설거지가 왜 이래? 그냥 하지마" 라고 쌀쌀맞게 말했었다.
잘 보이지않아서, 손에 힘이 없어져서, 손목과 손가락이 아파서 였다는 걸 이제야 아는 무심함.
자식과 함께 명동 구경도 하고 쇼핑도 같이 했음 얼마나 좋았을까
철없는 나이 든 자식은 엄마가 좋아하는 게 그냥 돈봉투라고 생각했었다.
" 엄마, 갱년기 힘들었지? 나도 나이들어보니 신발 짝짝이? 그건 아무것도 아니더라. 옷도 거꾸로 입을 때도 있고 머리속에서 하고싶은 말 입안에서 뱅뱅 돌고. 나도 이제는 설거지할 때 애들한테 혼이 많이 나. 잔소리는 기본이야. 드라마 보면서 조는 건 또 어떻고...."
엄마와 하고싶은 말은 너무 너무 많은데 할 수가 없다. 엄마의 핸드폰도 해지한 지 오래다.
엄마.거기서는 우리생각 그만해
온전히 엄마인생 살아야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년이 지나니 눈물이 덜하고 왜 조상들이 3년상을 치렀는지 이해되었는데
엄마의 부재는 3년이 아니라 30년이 지나도 눈물이 마르지않을 것 같다.
남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러시아 속담에도 아버지의 사랑은 무덤까지, 어머니의 사랑은 영원히란 표현이 있다.
엄마는 계실 때는 잘 몰라도 계시지않을 때 느끼는 황망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더라.
엄마는 참 다르다. 다른 느낌이다.
스무살에, 서른이 되기 전 친정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지인 몇과 이야기를 나누다 나는 엄마와의 추억거리가 더 있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적어도 할머니가 된 엄마 얼굴까지 뵈었으니 꿈속에서라도 만나면
알아볼 수 있을 게 아닌가.
다시 태어나면 엄마, 내 딸로 태어나주라 내가 엄마에게 받은 것 이상으로 잘할께...란 말도 있지만
난 그러고싶지않다.
친한 친구관계로 태어나고싶다. 가족도 좋지만 서로에게 더 잘해주지못해 미안해하고 가끔은 돌이킬 수 없는 직선타로 상처도 준다.
엄마가 오케이라면 그렇게 친한 친구로 태어나서 밤새도록 이야기나누고 누구 흉도 보고 남친비교도 하고
새로 산 옷 자랑도 하고 늦은 밤 술 한잔 하자며 불러내기도 하고... 그런 좋은 친구로 만났으면 좋겠다.
종종 인용하는 문구가 있다.
신이 사람을 만들었고 모두에게 다가갈 수 없기에 어머니란 존재를 만드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