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궁궐 내에는 권위나 위엄을 상징하는 조각상을 찾을 수가 없다. 조그만 크기의 작고 우수깡스러운 모습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부정한 액을 막아 줄 뿐 사람을 위협하는 표정을 짓지는 않는다. 집안에 걸어 놓는 민화에서 마을을 지켜주는 장승에 이르기까지 그 멋쩍은 무서움은 어색하기만 하다.
이런 그들에게 마을을 지킬 수 있게, 수호신의 이름을 붙여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밤거리를 걷다 만나면 무서울 거 같은 존재, 마을 어귀에 나무인듯 달빛에 그림 진 표정은 가히 심장을 쫄리게 한다. 낮에 놀리듯 보았던 다른 표정은 마을에 침입하는 나쁜 기운과 어둠을 좋아하는 잡귀 잡신에게 위협이 될만하다. 지역과 풍속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누군가에게는 바보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신이 되었던 장승... 힘들었던 시절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고 싶었던 마음이 익살스러운 얼굴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함양 벽송사 목장승 / 통도사 국장생 / 문화동 벅수
광화문 문배도(사진 출처 : 문화재청)
장승의 이름과 성별
지금껏 그렇듯 장승에 대한 정확한 기원이나 만들어진 배경은 추측일 뿐 알지 못한다. 이들은 마을이나 사찰 입구 또는 길가에 세워져 나쁜 액을 막아주는 수호신이었던 장승은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비보, 지역 간의 경계, 거리의 이정표, 풍요의 의미를 갖는다. 장승은 남녀의 성 구별이 아닌 양과 음의 조화를 의미하였으나 후대에 남과 여의 상생과 다산의 의미로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게 하거나 사이좋은 부부처럼 나란히 서있게 했다. 몸체 전면에 글자를 새겨 다섯 방위와 방향을 지키게 하고 수염의 유무에 따라 남녀를 구별하여 대장군은 동쪽에, 여장군은 서쪽에 세웠다. 상원장군과 하원장군은 음력 1월 15일(한 해 농사의 시작)과 10월 15일(한 해 농사의 마무리)을 의미하고 당장군 주장군은 광화문에 걸린 "문배도(문을 지키는 신)"에서 처럼 성을 지키는 의미로 성문 앞에 세우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사원전(절이 관리하게 하는 토지)과 구분하기 위해 국장생을 세워 경계를 두었다.
장승은 까탈스럽다.
장승의 재료는 돌과 나무를 사용하는데 개소리나 닭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자란 소나무와 깎기 쉬운 오리나무를 사용하고 햇볕에 노출되면 쉽게 갈라지는 옹이는 피한다. 남장승은 양지에서 여장승은 음지에서 자란 나무로 하며 나무를 베고난 자리는 산신의 노여움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흙을 덮어 흔적을 없앤다.
나무의 머리 부분이 몸통에 비하여 크게 보이도록 뿌리 쪽이 장승의 머리 부분이 되도록 조각하였다.
나무는 시간이 지나면 썩기에 돌로 제작하여 기존 나무 장승을 대체하였다.
정월 대보름놀이
장승은 나무를 베는 날(정초)과 세우는 날 (음력 14일), 매년 돌아오는 정월 대보름에 제를 올린다. 우리나라는 일 년 열두 달 중 첫 보름달이 뜨는 날을 제일 중요하고 크다는 의미로 "큰 보름"이라 하고 "오기일" 이라고도 하였는데 왕의 목숨을 살려준 보답으로 까마귀에게 찰밥을 지어 제사를 지내는 날이기도 하였다.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이 의례는 달집 태우기와 쥐불놀이들을 통해 논과 밭 주위에 불을 놓아 겨우내 풀에 살던 병충해를 소각하고 각 마을의 수호신들에게 풍농과 화평, 가족의 안녕을 빌었다. 선조들은 대보름 다음날을 "귀신 날"로 정하고 일을 하면 귀신에 의한 병이 든다 하여 밤새도록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술 마시고 논 후유증을 풀게 하였다. "귀신 날"저녁 귀신 퇴치 방법으로 널뛰기를 하여 널빤지가 위로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땅에 닿을때 ‘쾅’ 또는 ‘탁’ 하면서 나는 소리로 널 밑 속에 들어가 있는 귀신 머리를 깨뜨린다 여겼고 윷놀이
또한 귀신을 퇴치하는 놀이로 윷가락을 던지면서 나는 소리로 귀신을 부서뜨린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 길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던 장승들과 풍속들이 선교 활동을 위해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들의 시선에는 한국 문화의 낙후성이라 인식했을지 모른다. 이런 인식이 지금도 누군가에게는 우리의 전통적 민간신앙이 이교도의 생활 풍습으로 보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