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과 시집(詩集)
김사인의 『시를 어루만지다』를 읽으면서 많은 시인의 시를 접해보았다. 시집(詩集)이라는 시를 읽고 나니 첫사랑이 떠올랐다.
한 지붕 두 가정으로 우리 집 2층에 살던 1년 먼저 태어난 이웃집 오빠였다. 막내 고모 친구이기도 했던 오빠의 엄마는 그냥 ‘고모’라고 호칭을 부르는 친척이나 다름없었다. 어려서부터 한 동네 줄 곳 살다가 일명 변두리라는 곳으로 이사를 한 후 자주 못 보았다. 1년에 몇 번은 고모의 친구 모임으로 함께 만났다. 특히 방학 때마다 서로의 집을 오고 가며 놀다 오곤 했다. 한 번도 남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는데 결국엔 애정이 생겼다. 초등학교 때 오빠가 손을 잡아 준 기억 이후로 나 홀로 좋아하게 되었다. 사춘기 시절 돌이켜보니 스타도 좋아하지 않았고 학창시절 인기 많은 총각 선생님조차도 좋아해본 적이 없었다. 오직 첫사랑이자 짝사랑인 오빠에게 나의 고백을 전달했지만 단번에 거절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첫사랑 이야기를 나눌 만큼 일명 이웃사촌으로 여전히 잘 지내는 사이다. 대소사에 오고 가며 만나는 친척 사이가 되었다.
시집(詩集)에 대한 나의 사랑은 고등학교 3학년 여름 방학이 시작되는 날 찾아왔다. 대학을 다니던 첫사랑이자 짝사랑이던 오빠가 집으로 찾아왔다. 고3인 나를 응원하기 위해서다. 다 같이 밥을 먹고 헤어질 때쯤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대학 입시를 잘 보길 바란다고 했다. 헤어지고 나서 오빠가 건네준 선물 포장지를 뜯어보니 시집이었다. 서정윤의 『홀로 서기』이었다.
얼마나 유명한 시집이었는지 처음엔 알지 못했다. 감수성 예민한 고3 여학생에게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던 오빠가 건네준 시집을 통째로 외우는 능력을 발휘하게 했다. 고3 내내 시집을 들고 다니며 행복했던 추억이다.
오빠를 좋아하는 마음이 학업에 동기 부여는 되지는 않았다. 그해 대학 입시는 실패했다. 서정윤 시인의 시집이 첫사랑의 빈자리를 채웠다.
인생을 살다 보니 마음의 나이는 잘 먹지 않는가 보다. 서로의 대소사를 챙기는데 슬픈 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를 유난히 예뻐해주시던 첫사랑 오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코로나임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장을 찾았다. 당연히 가야 하는 자리였다. 가족들을 위로했다. 옛날 어렸을 때 우리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첫사랑 오빠가 코를 자주 흘렸다느니, 내가 어려서 수영장에서 입은 수영복을 보니 배가 많이 나왔다느니 하는 우스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내 눈에는 이웃사촌인 오빠가 멋있게 늙어 있음이 보였다. 며느리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상주들과 인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또 서정윤의 『홀로서기』 시집이 기억났다. 그때의 시간에 머물러 있는 마음은 소녀 같은데 모습은 현실에 아줌마로 살아가고 있다. 나이든 지금의 시간이 싫지 않다. 마음은 늙지 여전히 그대로다. 늙지 않음에 대하여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시집이 언제나 가까이 있었다. 스타들에 대한 사모함보다는 시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셌다. 안도현 시인, 나희덕 시인, 나태주 시인, 정호승 시인, 장석주 시인, 이병률 시인 이외에도 많은 시인을 시집을 통해 만났다.
시인을 직접 만나고 싶은 마음까지도 생기기도 하고 시인의 시집을 다 찾아서 읽어보기도 했다. 독자를 향한 시인의 마음은 숨은 그림 찾기 같다.
시가 나를 어루만져 주어서 힘들고 지칠 때 위로가 되었던 시간이 많았다. 물론 도통 이해가 안 되는 시들도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방법은 자꾸 소리 내어 읽어보고 암송해보는 것이다. 일반 책과 다르게 시집은 오랜 시간 옆에 두고 읽어야만 한다.
어느 날 시 한 절이 나의 마음을 쓰다듬어주고 충격을 주기도 하고 지혜를 주기도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보다는 세상을 이해하는 마음을 살포시 던져주고 달아나버린다.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읽어야 하는 시집은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공유하고픈 애인과도 같아서 시를 사랑하는 마음은 첫사랑과 같다.
대학원 시절 시 창작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시를 써보지는 않았지만, 시를 읽었던 시간을 동원해 과제를 하는 가운데 부모님을 생각한 적이 있다. 마침 명절이기도 해서 「떡국」이라는 시를 적어 본 적이 있다. 시인이 시 한 편을 적어 내려가는 시간이 결코 짧지 않다. 시 한 소절을 쓰기 위해 많은 생각을 할 것이다. 세상에 떠도는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마음의 지경을 넓혀야만 했을 것이다. 사물이 말을 걸어와도 귀 기울이는 낮은 자세가 필요했을 것이다. 시인의 마음은 모든 것을 감싸고 나누는 어머니와 같다.
나의 자작시 「떡국」을 적어 내려가니 부모님의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그 감사함을 다 담지 못했다. 그 사랑을 몇 자 적어본다.
떡국
하늘에 올리는 소원
한 그릇
복을 빌며 먹는 음식
한 그릇 상에 올리지 못했어라
동전처럼 얇고 가늘게 썰어
꿩고기 넣은
한 그릇
복에 복을 더 하길
소망 담아
한 그릇 수북이 담아 드리고 싶었어라
침묵 가운데
‘괜찮여’ 하신 눈빛에 눈물이 고였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