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 머금은 코스모스
가을비가 내리는 날, 신라천년의 시간 여행을 80Km를 달려 황룡사지 황룡사역사문화관으로 갔다. 또독 또오독 빗방울을 머리에 이고 넓디넓은 황룡사지(사적 제6호)를 걸었다. 목적은 황룡사역사문화관이었으나, 역사관 관람 전에 야외를 둘러보다가 뜻밖에 코스모스를 발견했다. 황룡사역사문화관은 담에 보기로 하고 코스모스 길을 걸었다. 오랜만에 어릴 적 신작로에서 마주했던 키 큰 코스모스가 반가웠다. 내가 마을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오늘처럼 우연히 추억의 코스모스를 만날 수 있어서다. 어릴 적 가을 운동회가 다가오면 핑크 꽃이 많이 피면 청군이 이기고, 하얀색 코스모스가 많이 피면 백군이 이긴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로 백군 청군의 승리를 가름했던 추억이 남아 있다. 요즘은 아스팔트 갓길에 피다 말고 시들어버린 코스모스를 보고 풋풋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시큰둥해지곤 했다.
오늘 행운처럼 다가온 신라의 땅 황룡사지에서 키 큰 코스모스를 만났다. 코스모스는 다양한 색으로 가을비를 맞으며 빗방울을 머금고 추적추적 빗소리를 내며 가을에 섰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2시간 내내 또독 또오똑, 하얀 샌들은 풀잎에 실키었고 흰 바지는 흙탕물이 튀어 자국을 남겼다. 그래도 좋았다. 얕은 돌로 블록 경계를 쌓아놓은 돌을 밟고 작은 키를 치켜세우고 코스모스 속에 배치한 상현달, 하현달의 포토존과 분황사 당간지주를 살펴봤다. 이내 발걸음을 옮겨 신라 천년의 대지를 밟으며 역사 산책을 했다.
황룡사 경주역사 유적지구
선덕여왕 14년(645)에 당대 최고 높이의 9층 목탑이 조영 되기까지 4대 왕 93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완공된 동양 최대 규모의 호국사찰이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골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흔적만 남았다. 현재는 건물과 탑 자리를 알려주는 초석들만 남아 있다.
1963년 국가 지정문화재 사적 제6호로 지정되었고, 2000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황룡사지 리플릿 참고)
황룡사지 역사 산책
한없이 넓은 땅 황룡사지에서 역사 산책을 하면서 황룡사 금당지와 목탑지, 우뚝 솟은 분황사 당간지주 등을 살펴봤다. 오늘은 답사가 아닌 산책 삼아 걸었다. 혼자가 좋은 날, 가을비와 코스모스를 즐기며 발길 닿는 대로 오롯이 즐겼다. 또독 또오독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오래 머물렀던 황룡사지 역사 산책을 끝내고 황룡사역사문화관 1층 로비 카페에서 카푸치노 한 잔을 마셨다. 창가에 앉았으니 황룡사지의 넓은 땅과 코스모스가 시야에 들어오고 창가에 빗방울이 맺혔다. 창너머 비가 방울방울 내리고 있었다. 황룡사 9층 목탑 그림이 새겨진 커피 잔에서 계피향이 코끝에 스친다. 숨 가쁘게 황룡사지를 가로질러 다닌 후 카푸치노 한 잔은 달콤한 행복감이 차올랐다.
황룡사지 산책 후기
황룡사지를 읽고 쓰고 말하며 끝내 브런치에 기록을 한다. 넓은 주차장에서부터 넓은 대지의 넉넉함이
여행자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광활한 대지의 중력에 압도된 신중년은 풀어놓은 동물들처럼 동서남북을 가로질러 다니며 코스모스와 황룡사지 역사 산책을 했다. 되도록이면 느긋하게 신라 천년의 시간에 집중하려 애썼다. 신라 천년의 시간 여행은 가랑비에 옷 젖듯 내 안에 역사의 흔적이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