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볼펜 몇 자루 있으세요?

by 요일





분리수거의 기본은 분리이다.

복합재질로 이루어진 것들은 재질별로 나눠야 한다. 하지만 분리해도 소용없는 것들이 있다. 바로 손바닥보다 작은 것들이다. 이런 작은 사이즈는 플라스틱 선별장으로 향해도 재활용될 수가 없다고 한다. 빠르게 돌아가는 컨테이너에서 PET, PE, PP 등 재질별로 선별해야 하는데 너무 작은 것들까지 골라낼 여력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볼펜은 일반 쓰레기이다.

지난해 영어 필사를 하던 어느 날, 다 쓴 플라스틱 펜을 쓰레기 통에 버리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건 내가 좋아하는 0.3mm 굵기의 새로 산 슬림 펜이었고, 벌써 3자루째였다. ‘아, 안 되겠어! 앞으로 쓸 게 산더미인데.. 그럼 연필로 해볼까?’ 나는 집에 있는 연필들을 끌어 모았다. 사은품으로 받은 연필, 동네 이웃에게 받은 연필, 아이들 삼촌이 신혼여행에서 사 온 하와이 연필까지. 아주 많은 연필들이 집 안에 숨어 있었다.





시작은 좋았다. 필기감이 깔끔하지 못해도 연필의 흑연이 노트에 번져도 괜찮았다. 난 지구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연필로 쓰는 거니까. 그런데 자꾸 툭툭 부러진다. 다이소 2천 원짜리 연필깎이의 문제인지, 나의 힘 조절이 문제인지 모르겠다. 특히 하와이에서 온 연필은 흑심이 보이기가 무섭게 부러졌다. 필사하는 시간보다 연필 깎는 시간이 많아지자, 연필로 필사하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이번에는 집 안에 있는 볼펜들을 소환했다.

남편의 책상 서랍에서 한 움큼 발견되었다. 이런 볼펜들을 놔두고 슬림한 취향의 0.3mm 펜을 또 사 오다니. 그런데 필요 이상으로 많았다. 혹시나 나눔이 가능한 곳이 있을까 싶어 찾아보다가, 안 쓰는 학용품을 기부할 수 있는 곳을 발견했다. 아이들이 쓰지 않는 새 노트, 새 연필과, 볼펜, 바인더, 등을 담아 택배를 보내며 마음이 흐뭇해졌다. 물건의 순환, 잊혀진 물건이 쓰임을 되찾는 일은 나에게도 지구에게도 좋은 일이다.








그것은 일종의 사랑이다. 그렇지 않은가?

찻잔이 차를 담고 있는 일

의자가 튼튼하고 견고하게 서 있는 일


바닥이 신발 바닥을

혹은 발가락들을 받아들이는 일

발바닥이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아는 일


나는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에 대해 생각한다.

옷들이 공손하게 옷장 안에서 기다리는 일

비누가 접시 위에서 조용히 말라가는 일

수건이 등의 피부에서 물기를 빨아들이는 일

계단의 사랑스러운 반복

그리고 창문보다 너그러운 것이 어디 있는가?


팻 슈나이더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이란 시가 있다.

서랍 구석에서 또는 연필꽂이에서 소외된 채 기다리고 있는 연필과 볼펜들. ‘ 저 좀 기억해 주세요!!’ 사물들은 그렇게 인내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상상해 본다. 집집마다 안 쓰는 볼펜과 연필들을 자루에 담아 모으는 일을. 그리고 어려운 형편의 이웃이나 저 멀리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이 한글이 적힌 연필을 손에 쥐고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이제는 좀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잊혀진 물건에 존재감을 되찾아주는 일을.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만드는 데 작은 도움이 되는 일을.



지금껏 미니멀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퍼즐판은 나와 우리 가족의 이야기만 담고 있었다.

앞으로 그 너머의 이야기도 알아가고 싶다. 모든 물건에 숨겨져 있는 아름답고 때론 슬픈 보석같은 이야기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