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도 계속 오면 감흥이 없어지다니.
올해는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이 오면 제일 신나는 건 아이들이고, 어른들은 해야 할 일이 늘어난다. 빙판길로 출퇴근도 어려워지고, 집 현관의 얼룩진 흙물을 계속 닦아내야 한다. 그렇게 몇 번의 큰 눈이 내리고, 엊그제 다시 창 밖으로 굵은 눈송이가 흩날려 아이들에게 물었다.
“얘들아, 눈 놀이하러 안 나가니?”
“음. 내일 아침에 나갈게요”
"오늘 아침에 나간다며, 이제 눈 녹을 텐데.."
"안 나가도 될 것 같아요. 이제 눈이 지겨워졌어요”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유난히도 눈을 애타게 기다리던 아이들이었다. 첫눈이 내린 날은 온 열정을 쏟아부었고, 지난주 내린 폭설에도 신나게 놀던 아이들인데. 그렇게 귀하던 눈 소식도 자주 들으면 시들해질 수 있구나 놀라웠다. 아이들의 동심도 새로움 앞에서만 반짝였던가!
물건의 소비하는 마음도 이와 같았을까.
눈은 언젠가는 녹는다.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온 마음으로 즐기고 싶다. 하지만 너무 자주 찾아오면 현실적인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그토록 바라고 기다리다가 포장지를 뜯는 순간의 행복은 폭죽과도 같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 연기처럼 감흥도 옅어지기 마련이다. 그 가벼운 설렘의 지속을 위해 또 다른 물건을 소비하지는 않았는지. 이따금 존재감을 잃은 물건을 발견할 때면 터트린 폭죽의 잔해처럼 허무해지기도 한다.
주체적 소비자로 살아갈 수 없다면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광고판이 설치되던 날,
아이들과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짧은 시간마저도 시선은 흥미로운 광고에 머물도록 설계된 세상에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슬퍼하면서도. 글 하나를 읽기 위해서는 수많은 광고에 눈길을 줘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고, 짧은 광고 한편을 봐야만 동영상을 재생할 수가 있다. ‘건너뛰기’ 해야 할 게 너무도 많은 일상에 익숙해져 있었다.
나는 좀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손가락을 내리며 추천 마법사가 골라 준 책들을 편하게 고르고, 신중함이라고 자부하며 리뷰를 꼼꼼히 읽는 내 모습을 깨닫기 전까지는. 나의 취향은 도처에 수집되어 있었다. 이런 환경설정이 물건이 필요할 때 시간을 절약해주고, 좀 더 정확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나는 결코 주체적 소비자는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덜 의존적인 방법은 있을 것이다.
완벽하지 못해도 좀 더 현명한 소비로 이어지는.
이것은 ‘반드시' 필요한가
이것을 대체할 물건은 없는가
이것에 나 자신을 투영하지 않았는가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다음 달 쇼핑 목록에 적는다.대체할 물건을 찾기도 하고, 굳이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는 결론이 내려지기도 했다. 소비의 목적은 필요이고, 나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무언가를 소유한다고 해서 내 일상이 사진 속의 이상적인 공간이 되거나, 나 자신이 완벽한 모델이 될 수 없음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오래된 손수건이 2장이 있다.
등산용 손수건과 파스텔 톤의 줄무늬 손수건이다. 주머니에서 꺼내는 순간 좀 더 감각적이고 예쁘게 보일만한 디자인이면 더 좋겠지만, 이것만으로도 괜찮았다. 10년째 보관만 하다가 다시 꺼내 쓰게 된 이유는, 외출할때 휴지 대신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무언가를 닦는 본분을 다할 수 있는 상태였고, 오랜 시간을 견뎌낸 물건들은 애정이 남아있기 마련이다.
소비보다 진짜 경험에 집중하는 삶
‘감성 경험주의’라는 마케팅도 있다.
" 당신만의 특별한 순간을 선사합니다. 당신만의 가치를 찾아 드리겠습니다. 이 물건을 통해서 말이죠!”
이제는 소비할 때 감성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나에게 감성이 필요한 순간은 물건이 아닌 시간을 경험하는 순간들이니까. 작은 동네 꽃밭에서 놀아도, 제주도까지 연결되는 감성이 있다면 평범한 일상도 충분히 풍요로워 질 수 있지 않을까?
눈은 녹기 시작했다.
도로가 마르고 회복되려면 며칠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그 안에서 집 앞의 나무는 그대로였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이 이어진 겨울 나뭇가지를 차분히 바라보는 연습을 한다.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