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는 냉장고 3대를 소유하고 계세요.
업소용 2대와 가정용 1대. 냉장고 안은 늘 가득 차 있습니다. 시부모님 두 분이서 살고 계시지만, 가족, 사돈, 팔촌에 지인까지 챙겨야 마음이 놓이는 정 많은 분이시거든요. 미니미한 손을 가진 저는 막내 며느리입니다. 어머니 스타일에 적응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요. 첫째 낳고 독점 육아하던 시절, 어머니 택배가 도착하는 날은 걱정부터 앞섰습니다. 남편이 집에서 밥을 먹는 날은 주말 저녁뿐이었고, 택배 상자를 뜯을 기운조차 없던 시절이었죠. 아이들이 점점 크고 저에게도 요령이라는 것이 생기면서, 어머니 스타일을 받아들일 방법을 찾아갔습니다. 맥시멀 어머니와 미니멀 며느리 사이의 간극을 좁혀 균형점을 찾는 일이 필요했어요.
시댁 가기 전 냉장고를 비워라
"어머니~ 이거 다 못 먹어요. 조금만 주셔요~”
"위에서 사 먹으면 다 비싸~"
차 트렁크가 닫히지 않아 상자들을 퍼즐처럼 맞춥니다. 아무리 말씀을 드려도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어머니의 기쁨과 즐거움을 막을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시댁에 내려가기 전에는 그야말로 비상체제에 돌입합니다. 장보기를 멈추고 냉장고를 텅텅 비우는 것이죠. 과일 상자, 계란 4판, 농사지으신 야채, 해산물 등등. 그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아끼고 아껴서 다 싸주시기 때문이에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친정에 들러 나누고, 그래도 많으면 가까운 이웃들에게도 바로 나눔 합니다. 신선해야 맛있으니까요. 집으로 돌아와 만반에 준비가 된 냉장고를 엽니다. 금방 시드는 야채와 유통기한이 짧은 것들을 먼저 먹을 메뉴를 짜고, 나머지는 품목별로 소분하여 냉장, 냉동고에 차곡차곡 세워둡니다. 예전에 비하면 아주 수월하게 정리를 마칠 수 있게 되었지요.
갈치 30 미와 칼 한 자루
"갈치 보냈어~"
다음 날, 점심 무렵 아이스 박스가 도착했어요.
가지런히 놓인 은빛깔의 갈치 30 미와 칼 한 자루. 칼이 안 드는 걸 대비해 어머니의 센스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칼 한 자루도 같이 보내 주셨지요. 그날은 오후에 일정이 있는 날이었어요. 아이들 하교 전까지 어떻게든 마무리 지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급하게 이웃에게 갈치 지분을 약속하며 SOS를 요청했어요. 갈치를 씻어 머리와 내장을 도려내고 지느러미를 자르면, 옆에서 소금을 뿌려 나누는 일을 도와주어 간신히 마무리를 할 수 있었지요. 아무리 닦아도 비린내가 몸에 남아있는 것 같았지만, 엄청난 숙제를 해낸 듯한 쾌감과 선뜻 도움을 준 이웃의 정에 마음이 따뜻한 날이기도 했어요. 물론 당분간 식탁 메인은 갈치구이입니다.
“내일 택배 받아라~”
“네~ 어머니! 감사히 잘 먹을게요!”
이번에는 돼지등뼈 우거짓국 두 봉지와 문어, 낙지, 김, 훈제오리, 떡국떡, 등등 어머니가 그동안 아껴둔 재료들이 가득 들어있습니다. 행여나 새거나 뜯어질까 걱정하시는 마음도 곳곳에 겹친 박스 테이핑을 보면 알 수 있었지요. 어마어마한 양의 등뼈 우거짓국. 평소 고기를 먹지 않지만, 무장해제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제가 먹지 않으면 버려야만 하는데 차마 그럴 수는 없었어요. 어머니가 주신 음식이기도 하고, 환경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음식물 쓰레기로 발생되는 온실가스, 연간 20조 손실’이 공식처럼 머릿속에 착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지요. 오랜만에 먹은 고기. 세상에나 맛있습니다. 아직 윤리적인 비건은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순간이기도 하고요.
우리 집 냉장고는 늘 비어있다
그래서 냉장고는 늘 전시상태로 긴장감이 흐릅니다.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택배를 위해,
어머니의 사랑을 감사히 받아들일 준비를 하며,
오늘도 냉장고를 비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