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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일 Feb 25. 2021

가끔은 요리를 멈추고 싶다


겉모습은 참으로 예뻤으나



아이들이 좋아하는 호박죽.

언제부터인가 속도가 미덕인 시대에 편승하여, 새벽 배송으로 주문한 레토르트 호박죽을 데워주고 있었다. 아기 때야 뭐든 직접 만들어 주는 정성이 있었고, 최근 2년 동안 외식 횟수도 눈에 띄게 줄여가며 알뜰히 살았다는 소심한 핑계를 혼자 되뇌면서. 그렇게 시간의 효율을 내세우며 편리함에 기대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코로나로 인해 증가한 쓰레기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이대로는 안 되겠어!!” 뭐든 직접 장을 보러 다녔다. 쓰레기가 줄어드는 즐거움과 스스로의 부지런함이 대견하여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던 날들이었다.





이런 나에게 크나큰 시련을 안겨준 건,

바로 호박이었다. 매주 월요일이면 집 근처 길가에서 야채를 파는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갓 수확한 싱싱한 야채를 비닐 포장 없이 살 수 있다는 기쁨에 자주 들르곤 했다. 봄에는 두릅, 여름에는 가지, 호박잎, 고추들. 마트보다 저렴하고 많은 양의 야채를 장바구니 가득 담아오는 일이 그리 좋았다. 계절이 늦가을로 접어들던 어느 날, 도로가에 줄지어 있는 늙은 호박이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 호박죽이 먹고 싶다는 아들 말이 떠오르면서. “제일 괜찮은 걸로 골라 주세요!” 생애 첫 늙은 호박의 선택은 보다 신중해야 했기에 전문가에게 부탁드렸다. 비닐도 사양하고 흙이 묻은 호박 한 덩이를 보물처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물방울이 또르르 흐르는 사진 속의 호박.

내 얼굴 세수할 때 보다 더 정성스럽게 닦아서일까, 호박이 너무 예뻐 기념사진까지 남겼다. 단단한 껍질에 여러 번 힘을 줘가며 칼집을 내서 설레는 마음을 담아 반으로 쩌억- 가르는 순간. 예상했던 노란 빛깔 호박씨는 보이질 않고, 스산한 안개처럼 거뭇거뭇한 실들이 또다시 좋지 않은 예감을 불러일으켰다.




“꺄아아아아악-“

호박 속에서 꾸물거리는 형체가 이내 튀어올랐다.

나의 비명소리에 부엌으로 뛰어온 아이들. “우와~”바닥에서 몸을 웅크렸다가 온 힘을 다해 점프하는 애벌레. 아이들은 귀엽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설렘과 기대가 무너져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몇 개월 만에) 비닐장갑을 꺼내 바닥에 나뒹구는 애벌레들을 주워 담았다. 집에 있는 가장 큰 비닐을 꺼내 반으로 갈린 호박 두 쪽을 담아 환불하러 가니, “어머나!!! 이상하네~ 두 번이나 이런 경우는 없는데.” 아주머니는 고개를 갸우뚱하시며 오천 원을 내주셨다.





두 번째였다. 2주 만의 재시도에서도 ‘꽝!’이 걸린 나는 호박죽에 대한 모든 전의를 상실했다. 그리고 7개월 만에 새벽 배송 쿠폰의 유혹을 덤덤히 받아들이며 ‘정성 가득 호박죽’ 3 봉지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연달아 두 번이나 썩은 호박을 고를 확률과 전문가도 알 수 없는 호박의 심오한 속내를 생각하며. 그냥 나 자신의 운 없음을, 가끔은 느긋하고 편한 시간도 가지라는 뜻으로 여기기로 했다.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도무지 기운이 나질 않는 날이 오면, 조금 느슨하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팽팽한 줄에서 느껴지는 긴장과 한없이 늘어지는 포기가 아닌, 조금만 잡아당기면 탄력 있는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을 만큼만 느슨하게. 앞으로의 롱런을 위해서는 가끔 쉬어가는 일도 괜찮다고 이야기해주면서.




열심히 장을 보며 쓰레기를 줄여나갈 것이다.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며, 환경과 건강을 생각하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계속해서 배워나가고 싶다. 올해도 가을이 오면 늙은 호박을 사러가야겠다. 또 ‘꽝’이 나오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새벽 배송이라는 히든카드를 꺼내 쓰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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